매일신문

[박미영이 파리에서 만난 사람] 독립 큐레이터 아트 컨설턴트 최선희

지난 가을 어느 날 아침. 나는 생 라자르역에서 베르사유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을 두고 환승을 해 찾아온 생 라자르역은 서늘한 아침 공기에 휩싸여 있었고, 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대면할 수 있었다. 모자를 쓴 중년남자가 신문을 펼쳐 들고 벤치에 앉아 있었고 강아지를 안은 여자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가 흑백 스틸로 눈앞을 스쳐갔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을 맡으면서 마르셀이 옛일을 회상하듯 나는 아누크 에메('남과 여'의 여배우)의 긴 속눈썹을 떠올렸다. 참 쓸쓸했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고 나는 스카프를 여몄다.

그때 파리는 미국의 키치 작가 제프 쿤스의 베르사유 전시로 들끓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제프 쿤스의 조악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풍선 설치작품들이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로코코풍 궁전에 전시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복궁 근정전 옥좌 앞에 돼지갈비식당 어릿광대 풍선을 세워두는 격인데, 실제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근엄한 초상화 바로 앞에 제프 쿤스의 거대한 바둑이 풍선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각상 앞에 전시된 각종 청소기들이며 거대한 바다가재들···.

그 '무엄한' 전시는 근대예술에 함몰되어 컨템퍼러리 아트(현대예술)에 비교적 취약한 파리예술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예견과 환호를, 또 그 위화감을 견디지 못한 일부 파리 시민단체의 시위를 연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파리에선 드물게 호오(好惡)가 엇갈리는 파격적인 전시였는데, 특히 논쟁하길 좋아하는 파리 사람들답게 잠시 들른 여행객인 나에게까지 그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했다. 어쨌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별다른 충돌 없이 제프 쿤스의 전시는 계속 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봉마르셰의 조용한 카페 델리카바에서 독립 큐레이터와 아트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는 최선희(37)씨를 만났다.

독립 큐레이터란 혼자서 전시를 기획한다는 뜻일 테고, 아트 컨설턴트가 정확하게 어떤 일이며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아트와 컨설팅의 합성어로, 고객에게 미술작품의 선정에 대해 조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려서부터 화집(畵集)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한눈에 반한 샤반의 '가난한 어부'를 배낭여행 중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주쳤다. 그때 운명의 힘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내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그 힘을 보여주었다."

상명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아시아나 항공에 입사해 근무 3년째 되던 해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1998년 소르본 대학에서 불어와 서양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그 또한 샤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2000년 전근을 한 남편을 따라 런던으로 이주해 다시 항공사 직원으로 1년 간 일했지만, 영어와 불어 다음의 세 번째 언어로 여겨진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의 근현대미술사 디플로마(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디플로마 과정 중 까다로운 교수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데 그것도 샤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을 동양인이었던 그녀가 정확하게 알아본 탓이었다.

그 후 극심한 경쟁률을 뚫고 크리스티 경매의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경매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의 그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크리스티 전시장에서 본 YBA(Young British Aritists)의 대표작가인 대미언 허스트의 도트 프린트가 그것이었다. (대미언 허스트는 삼성의 리움미술관이 구입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는 조금 얄궂게 널리 알려진 작가이기도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또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이 사나이는 거대한 상어를 통째로 방부용액에 넣고, 젖소를 열두 토막 내고, 죽은 사람의 머리를 옆에 두고 웃음 짓는 악동으로 유명한데 그녀는 오히려 그것들보다 예쁜 색색의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작품에 끌렸고, 그것이 또한 현대미술현장으로 자신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KBS의 런던 미술 코디네이터로 어렵기로 유명한 대미언 허스트와의 인터뷰를 성공시키기도 한다.

"크리스티 경매를 그만 둔 뒤 런던 중심가의 차이니즈 컨템퍼러리에서 일하면서 장 샤오강, 웨 민쥔, 왕 광이 등의 중국현대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우리나라 작가들의 위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독립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유니온 갤러리에서의 한국작가 5인 초대전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첫 솔드 아웃(전 작품 판매) 전시회가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탁월한 안목과 크리스티 시절 이전부터 런던의 미술현장과 영국의 대학 졸업 작품전 등을 뛰어다니며 발품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노력이 가져온 당연한 결실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5인의 작가 중 백현진은 2인조 밴드 '어어부'의 멤버이기도 하다.

유럽 미술계의 현황과 한국미술의 미래를 묻자 그녀는 크리스 스미스 전 영국 문화부 장관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영국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 개방하도록 그가 정책을 주도했다. 당분간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런던 현대미술이 세계무대를 주도할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뛰어난 작가들이 연이어 진출한 날이 올 것이다. 세계적인 갤러리 화이트 큐브와 미술투자회사인 파인아트펀드가 영국에 있다면 우리나라의 아라리오 갤러리와 K옥션 등이 있고, 최근에 조성된 아트 펀드 등을 봐도 미술품 투자에 대한 한국의 미래는 밝다."

2007년 남편이 다시 전근하면서 그녀는 파리에 왔다. 에펠탑 뒤쪽의 기 드 모파상 거리에 새 집을 얻고 딸 미나 아멜리를 낳았다. 그리고 봉 마르셰 백화점의 델리카바의 한 테이블에서 '런던미술수업'(아트북스, 2008년)을 집필하고, 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독립 큐레이터로서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면서 아트 컨설턴트의 일을 겸했다.

"큐레이터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란 뜻의 라틴어인 큐나토리아에서 왔지만, 작가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 또한 미술작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으로서의 역할도 기꺼이 맡고 싶다"고 했다. 이만한 내공을 지니지 않으면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일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파리를 떠나오던 날 샹젤리제의 루이뷔통 본사에서 '메타포즈(변모)'란 제목으로 한국작가 10인의 초청전시회가 시작되었다. 그 전시회의 리에종(작가와 갤러리 측의 연계와 관리)을 맡은 이가 최선희씨였는데, 서도호, 이형규, 함진 작가 등과 루이비통 측의 일을 아주 매끈하게 처리하더란 이야기를 다른 지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간되는 미술 월간지 '아트 뉴스페이퍼'와 한국의 '아트프라이스' '이모션' '뮤인'에 미술과 미술시장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기도 한 그녀가 언젠가 저 대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의 한국 전시회를 유치했다 하더라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박미영 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 최선희

▷ 1995년 상명대 불문과 졸업 / 아시아나 항공 입사

▷ 2000년 크리스티 경매 입사 / 차이니즈 컨템퍼러리 어시스턴트 디렉터 / 유니언 갤러리 세일즈 매니저

▷ 2008년 에스파스 루이비통 '메타포즈전(展)' 아트 리에종 담당 / '아트 뉴스페이퍼' '아트프라이스' '이모션' '뮤인' 객원 기자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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