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재 & 문화] 순종황제 남도순행

"융희 3년 1월 7일 대황제폐하께옵서 상오 6시 40분에 돈화문으로 출어하사 덕수궁에 문후하옵시고 남대문정거장에 임어하시와 동 8시 10분에 기차를 승하옵시고 하오 3시 25분에 대구에 안착하옵시어 동 4시에 행재소에 입어하사 경숙하심이라."

이것은 대한제국 시절 순종황제 남도순행의 첫날 행로를 요약한 내용이다. 융희 3년은 1909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의 일이다.

비록 기차라는 근대식 교통수단을 이용한 것이긴 해도, 전례가 없이 먼 길을 황제가 몸소 행차한 것은 그 자체가 그야말로 굉장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1909년 정초에 순종황제가 느닷없이 남쪽지방을 둘러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1909년 1월 4일에 공포한 조칙(詔勅)에 그 뜻의 대강이 이렇게 적혀 있다.

"…… 지방의 소요는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이런 혹한을 만나 백성들의 곤궁이 더 심하여질 것은 뻔한 일이니 ……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제신을 인솔하여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지방의 소요'라 함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일의병활동을 말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순종황제의 지방순행은 의병활동에 따른 치안혼란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목적이 제대로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결국은 이러한 순종황제의 지방순행은 당시의 한국통감(韓國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압박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조칙에는 "짐의 태자태사이며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는 짐의 나라에 성의를 다하면서 짐을 보좌하고 인도해주고 …… 그래서 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의 급한 일을 많이 돕게 해서 근본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하도록 기대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그에 대한 과분한 찬사가 덧붙여져 있다.

더구나 순종황제가 대구(1박), 부산(2박), 마산(2박), 대구(1박)의 순서로 남쪽지방을 순시하는 동안 접견인의 대다수는 지방관리, 통감부의 고관, 한국정부에 고빙된 일본인 직원, 지방의 일본인 거류민, 지방주둔 일본군대의 지휘관 등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특히 1주일에 불과한 지방순시를 나서면서도 그 가운데 이틀은 오롯이 일본해군의 위용을 시찰하는 데에 일정이 안배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사정을 잘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순종황제는 그해 1월 9일에 부산항에서 일본 제2함대의 기함(旗艦) 아즈마(吾妻)에 올라 그곳에서 세시간 반을 머문데 이어, 다시 1월 11일에는 마산항에서 일본천황이 직접 파견했다는 일본 제1함대의 기함 가토리(香取)에 올라 반나절 가량 이곳에 머물며 "일본해군의 세력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알았다"는 얘기와 더불어 일본천황의 건강을 축원하는 축배를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순종황제의 남도순행이 끝난 뒤에 곧바로 그해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이번에는 평양과 신의주 일대를 포함한 서도순행이 성사되었는데, 이번에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황제의 순행길을 인도하였음은 물론이었다.

황제가 지나는 길마다 알현객이 넘쳐나고 황제가 머문 도시마다 일시적으로 큰 광영이 되긴 하였겠지만, 그 이듬해에 황제는 기어이 망국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으니, 결국 순종황제의 지방순행길은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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