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모집 원서접수가 끝났다. 이맘때면 고등학교 진학지도실은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듯한 상태가 된다. 사실 예전처럼 학생들의 진로지도에 담임선생님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당면한 경제난 탓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고착된 관행이 원서접수 시즌만 되면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다. 이른바 돈 되고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는 학과를 찾아 너도나도 줄서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성을 고려한 진로지도라든가 대학, 학과의 비전을 감안한 진로지도는 어차피 어려운 상황인지 모른다.
요즘 학생들도 선생님에 대해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친구들에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방향, 어머니 모임에서 기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도인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만들어지고 있다. 대학의 진로를 결정하는 일은 중등교육에서 추구해오던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보다 큰 무대를 결정하면서 자신과 이웃의 삶을 가꿀 수 있는 분야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떠한가. 진학지도를 끝낸 3학년 담임교사들은 이맘때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문제는 서울대에 몇 명을 보내는가와 같은 계량적 통계를 통해 학교의 위상을 평가하는 잘못된 풍토도 한몫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내 아이를 어떻게든 판·검사나 의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모의 욕심이다.
줄잡아 우리나라의 직업은 1만개가 넘는다. 한 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을 60만명으로 본다면 그 60만명 중 과연 몇 명이 판·검사, 의사가 된단 말인가. 아이들의 장래희망 직업을 손꼽아 보면 20여개에 불과하다. 1만개의 직업 중에 20개라면 2%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든 아이들을 그 2%안에 집어넣어야만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
이공계 인력풀이 부족하다는 걱정이 나온 지 오래됐다. 그 비율은 OECD국가 중에서도 최하위다. 부랴부랴 정부에서도 다각적인 이공계 인력육성책을 만들어 내고, 이공계 인력 우대정책을 편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학부모들은 우수한 아이를 이공계에 보내느니, 의과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어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인습이다. 충분히 이공계에서 훌륭한 연구 인력이 될 수 있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안정성과 수익성에 너무 골몰하고 있다.
그런 학부모에게 담임교사나 진학지도교사가 아무리 설득을 해봐야 무용지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에 박인 그 목표를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다보니 멀쩡히 대학에 다니는 아이가 부모의 뜻에 따라 반수(재학 중 재수)를 하고, 다시 수능을 쳐서 의과대학에 간다. 이런 상황이 해마다 반복되다 보니 고등학교의 진학 담당자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지경이다. 이공계 인력이 부족해 국가 간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무슨 과학강국, 정보화 강국이니 해서 '장밋빛 애드벌룬'만 띄울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앞다퉈 특정대학 진학자를 고교별로 공개하고, 그것을 명문고의 잣대로 삼는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 학생들이 저마다 진학하고 싶은 대학과 학과를 주눅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정말로 하고 싶은 1만개의 직업인이 되기 위해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
더 이상 고등학교 진학지도 교사들이 '이것은 아니다'는 자조적 한숨을 쉬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아이가 바라는 공부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아이를 중심에 두고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진학지도에 대한 고정관념 속에서 우리의 국가경쟁력은 자꾸만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양근식(대구 능인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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