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삶에 대한 성적표

손바닥에 농포증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진료 받던 모범택시 운전기사. 그는 깔끔한 제복, 단정한 언행, 규칙적인 진료를 떠올리게 하는 기분 좋은 분이다. 피부병이지만 장기적으로 치료하려면 전신 건강상태 및 생활습관까지 다 파악해야 하기에 그분에 대한 간단한 신상을 알고 있다. 평소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였고 자녀들이 다 커 독립해 부인과 노후를 보내는 복 많은 노인 정도로 입력된 분이다. 비번인 날은 함께 진료실을 찾아 온 부인과도 안면을 유지했다. 하루는 부인이 혼자 오셨다.

"기사님은요. 약만 타시려구요?"이에 "원장은 알고 있어야겠기에…, 그 양반 갔데이." "예?" "그리 건강하던 양반이 주무시다가 갑자기 갔데이. 나도 그동안 정신 놓고 지내다가 인제 그 양반 뒷정리 하러 다닌데이."

오랜 환자는 먼 친척보다 더 많은 정을 나누고 사연을 많이 교감한지라 마치 피붙이의 부음을 들은 듯 멍하다. 몇 달 전의 마지막 만남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다. 농포증은 재발을 잘하는 난치병이라는 푸념과 막내딸이 공무원시험 합격했다는 자랑을 적절하게 섞어 성품처럼 간결하게 몇 마디 하신 후 "한 달 후에 다시 오겠소"라면서 가셨던 분이다. 한 달이 기약 없는 이별이 돼 버린 것이다.

현실에서 들리는 소란한 대기실의 윙윙거림이 꿈결처럼 아득하고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가 현실처럼 나를 눌러왔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유체 이탈처럼 나의 영혼은 육체가 담긴 진료실에서 분리돼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흘러간다.

며칠 전 '웰다잉에 대한 3가지 실천'이란 책을 보고 공감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훌륭하게 완성되려면 잘 먹고, 잘 사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잘 죽는가' 하는 웰다잉도 중요하다며 성실과 노력 없이 웰빙이 이뤄지지 않듯 웰다잉도 공부하고 준비해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먼저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인생에 중요한 것 10가지를 열거 해보고 그 가운데 잃어버리기 싫고 집착하는 것, 실제로 내가 삶에서 우선시하는 순서대로 나열하고 그 순서를 비교해 얼마나 조화로운 생활을 하는지 조명해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죽음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나의 사망기' 라는 제목 하에 사망일자 사망원인 가족명단 묘비내용 업적 장례절차 유언 등이 담긴 문건을 작성,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죽음 준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죽음의 의미와 준비 방법을 배우면 자신의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고 삶을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명상이나 종교가 있다면 더 수월할 수 있다.

적당히 가까운 지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죽음을 고찰해보며 손과 머리, 가슴과 영혼으로 이제 존엄한 죽음을 디자인 해본다. 그래야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심각한 회피, 또는 삶에 대한 애처로운 집착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고운미피부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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