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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바뀌면 보입니다"…공공디자인, 사람 우선 정책을

[대구 도심 재창조] (17)공공디자인-사람을 배려하자(상)

▲ 최근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한 계산성당.
▲ 최근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한 계산성당.

세계 주요 도시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도심재창조는 단지 겉으로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심을 만들려는 사업이 아니다. 사람이 들고 나기 쉽고,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심으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내 도시들의 도심재창조는 이런 측면에서 문제의식이 약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모든 도시가 판박이처럼 외양을 바꾸고 색칠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데만 몰두한다.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네살배기 아이와 함께 동성로를 걷던 엄마. 갑자기 "쉬가 마렵다"는 아이의 투정에 얼굴이 붉어진다. 도대체 예측불허인 아이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어디서 볼일을 치러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더 짜증스럽다. 백화점이나 공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상점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든지, 물건을 구입하고라도 써야 할 형편이다. 대구 도심은 생리적 욕구마저 제대로 해소할 수 없는 공간이 돼버렸다. 취재팀은 대구 도심에서 꼭 필요한 사람에 대한 배려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도심에 공중화장실을 만들자

취재팀은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시민들에게 "동성로에서 급한 볼일은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부분은 백화점, 지하상가, 공원이라고 말했다. 거리로 나오기 직전에 시간을 보냈던 커피숍이나 카페, 상가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거나 패스트푸드점에 몰래 들어가 사용한다고도 했다. "내성적이라 무조건 참는다"는 웃지 못할 대답도 돌아왔다.

'관광도시 대구'를 외치는 대구시에 외지인, 외국인에게 기본적인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도 중요하지만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서 '화장실 찾아 삼만리'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쾌적한 공중화장실 제공이 필수다. '깨끗한 화장실 만들기' 사업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국립공원 등에서는 활발하지만 도심에서는 아직 먼 일이다.

대구 도심의 공중화장실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2·28기념공원, 경상감영공원 등 공원에만 마련돼 있다. 대구시는 이를 늘리는 데 아직 뚜렷한 계획이 없다. 중구청 관계자는 "백화점 등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은 의무적으로 화장실을 개방하도록 하고 있지만 볼일 없이 들어가기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며 "동사무소 같은 공공기관 화장실을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다.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도심 한복판에 공중화장실, 이동용 화장실, 유료 화장실, 캡슐형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청소와 관리, 폐수처리 등을 법으로 정해 놓았다. 화장실 디자인에도 크게 신경 쓴다. 장애인만을 위한 열쇠식 화장실도 있고, 퇴비화 화장실을 만들어 위생뿐 아니라 다른 에너지로의 활용까지 고려한다. 또 공중화장실을 광고매체로 활용하려는 기업이 많아 조성과 운영에 상당한 도움을 받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서비스는 화장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인식 아래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도심에는 이런 시설이 크게 부족하다"며 "화장실이 불쾌한 이미지라고 해도 도심 특성에 맞게 디자인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면 색다른 볼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토큰박스를 새롭게 디자인하자

"토큰 없어지고는 매출이 예전의 10분의 1도 안됩니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아요."

토큰을 팔지 않는 버스승강장 옆 토큰박스. 도심 미관을 해치는 주범으로 꼽히는 이 공간은 지난해 7월 토큰제가 폐지되면서 갈수록 흉물이 되고 있다. 신문, 껌, 복권, 휴지, 교통카드 등을 팔고 있는 토큰박스 안은 3.3㎡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 판매상은 온종일을 보낸다. 지름 20㎝도 안 되는 작은 구멍으로 돈과 상품이 오갈 뿐 얼굴도 눈길도 마주치지 않는다. 쇠창살까지 둘러쳐져 마치 감옥처럼 보인다.

세계 도시들은 이런 키오스크(kiosk·공공장소에 설치된 간이 판매대나 소형 매점) 개선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깔끔한 디자인과 색깔, 개방된 공간에서 미소 띤 판매상이 손님을 맞는다. 관광객들이 도심에서 만나는 최일선의 관광홍보요원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들은 거리의 공공시설물 하나하나에 대해 연구하고, 거리와 어울리게 디자인하고, 다른 공공시설물과 조화를 이루도록 개선해 나가고 있다.

본지 도심재창조 자문위원인 하정화 미학박사는 "선진 도시들은 공공시설을 얼마나 쾌적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느냐를 도심재창조의 출발점으로 논의해왔다"며 "유럽의 경우 공공시설물을 한 나라의 복지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보고 있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서울시청 인근에 4가지 타입의 가로판매대를 시범 설치한 뒤 한 가지를 결정해 서울시 전체 가로판매대를 같은 모양으로 교체할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에 시민들의 제안과 참여를 빼놓지 않고 있다.

◆조명으로 밤을 디자인한다

홍콩, 프라하의 프라하성, 파리의 에펠탑, 런던 타워브릿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야경이다.서울의 야경이나 부산의 광안대교 등도 최근 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기능성 위주가 아닌 심미적인 연출조명은 어둠 속으로 사그라진 도심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조명은 밤 동안 도심의 골격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도시의 특성을 보여준다. 시민들에게는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안 유지 역할도 한다.

경북대 건축학부 이정호 교수는 "단순하게 조명 몇 개 더 설치하는 것으로 도시 이미지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며 "대구를 찾는 방문객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하고 대구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경관 조명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구청이 중구의 문화재 주변에 조명을 설치해 불을 밝히고 있는 사업은 도심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아주 고무적이다. 중구청은 지역의 문화유산인 계산성당(사적 제290호)과 대구사범학교(등록문화재 5호), 대구의학전문학교, 옛 도립대구병원에 야간 경관조명 설치공사를 마쳤다. 그동안 보존을 위해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어둠 속에 방치했던 문화재들을 밤의 풍경으로 되살린 것이다.

대구대 도시·지역계획학과 홍경구 교수는 "문화재 야간조명은 도심 곳곳에 녹아있는 영남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문화재 조명뿐만 아니라 대구 도심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조명 설치를 확대해 도심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김재경·서상현기자 사진·이채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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