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공휴일이 주말과 너무 친하게 붙어다닌다며 원망하던 사람들도 오는 14일 '밸런타인데이'만큼은 차라리 잘 됐다고 쾌재를 부를지 모를 일이다. 하루 앞당겨서라도 초콜릿을 선물하려니 이 일을 어쩌나? '13일의 금요일'이다. 이래저래 핑곗거리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면 불황 탓을 해서라도 경조사로 변질한 밸런타인데이를 피하고 싶건만 그럴 수 있을까? 초콜릿을 못 받는다고 아쉬워하는 남성들이여! 달력을 한 장 더 뒤로 넘겨보시라. 화이트데이도 토요일이다. 세상은 가끔 공평하다.
◆주는 마음, 탐탁잖고
직장 생활 5년차로 접어드는 류모(29)씨. 10명 남짓한 사무실 식구 중에 여직원은 류씨와 후배를 포함해 단 2명 뿐. 업무 특성상 남녀 구별이 별로 없는 곳이어서 평상시에는 성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생활했다. 하지만 매년 2, 3월이면 알게 모르게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먹고 초콜릿 선물쯤 할 수도 있다. "예전에 남자친구 있을 때도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면 '유래도 분명찮고, 국적도 모르는 데이마케팅에 휩쓸리지 말자. 괜스레 특정한 날을 정해 초콜릿, 사탕을 주고받는 것도 우습다'면서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입사 첫 해부터 남자 선배들의 등쌀(?)에 못 이겨 초콜릿을 선물하던 것이 버릇처럼 굳어져 재작년까지도 선물을 했다. 그렇다고 2천, 3천 원짜리 초콜릿을 선물할 수도 없어서 나름대로 큰맘 먹고 5천원짜리로 동일하게 초콜릿을 챙겼다. 비용만도 4만원. 작년에는 '이게 아니다' 싶어서 과감히 초콜릿 선물을 끊겠다고 선언했건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실감했다. "입사 2년차 후배가 수제 초콜릿이라며 예쁘게 포장해서 돌리더군요. 그것을 본 남자 동료들이 뭐라고 했을지는 짐작할 만하죠?" 올 초 달력을 뒤적거리던 류씨는 '14일 토요일'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사무실 홍일점인 손모(26)씨도 밸런타인데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부장부터 남자 동료까지 지나가는 말로 '초콜릿 안주냐'고 한 마디씩 던집니다. 차라리 1천원짜리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그런 말 하는 사람 입에다 하나씩 물려주고픈 심정입니다." 주부 사원인 홍모(34)씨에게도 엉뚱한 불똥이 튄다. 결혼한 사람은 예외인 줄 알았더니 '남편만 챙기느냐', '결혼했다고 여자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기분이 나빠진 경우까지 있었다. "미혼 친구들은 재미로, 혹은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받기 위해서 서로 주고받는다고 하지만 여성이니까 초콜릿을 챙겨야한다는 생각은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받는 마음, 개운찮다
초콜릿을 받는 남성이라고 해서 속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한 달 뒤면 똑같은 입장에 놓여야 하기 때문. 초콜릿, 사탕공장과 유통업체가 돈 버는 데 쓸데없이 도와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노총각인 황모(35)씨는 "초콜릿을 건네는 여직원마다 '올해는 결혼하셔야죠'라고 한 마디씩 건네는데,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게다가 5천원짜리 초콜릿 받고 사탕도 5천원짜리를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했다. '데이마케팅'으로 내놓은 초콜릿과 사탕 선물은 최소한 1만원은 넘어야 선물 모양새를 갖추는 추세다.
10년차 회사원 양모(40)씨는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아들고 가면 아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받았냐'며 눈을 흘긴다"며 "초콜릿을 처분하지 못해 사무실 책상 서랍에 몇달 동안 묵혀두기도 하고, 화이트데이가 되면 사무실 여직원들에게 나눠줄 사탕을 아내 몰래 사다가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두기도 한다"고 했다. 받아도 유쾌하지 않고, 줄 때도 찜찜한 걸 왜 지켜야하는지 모를 일이다.
기업체 차장인 박모(45)씨는 회사 여직원과 거래처 여직원으로부터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초콜릿을 책상 가득히 받아든다. 결국 나중엔 다 먹지도 못해서 전부 나눠주고 말 테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초콜릿 먹은 사람이 사탕 값을 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화이트데이라고 모른 척할 수도, 봉지사탕을 안겨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받은 초콜릿은 가격 차이도 천차만별이고 모양새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화이트데이가 되면 똑같은 사탕을 돌려도 욕 먹고, 서로 다른 사탕을 줘도 차별한다고 욕 먹기도 합니다."
◆여성은 언제나 챙겨주는 역할?
연인에게 사랑을 전하자는 밸런타인데이의 당초 취지(유래가 불분명하니 이마저도 확실치는 않지만)에서 벗어나 직장 동료끼리, 친구끼리 서로의 정을 나누는 의미에서 초콜릿뿐 아니라 작은 선물 하나쯤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소박한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경조사로 자리매김했다는 데 있다. 아울러 '밸런타인 경조사 날'에는 여성이 당연히 챙겨야 할 주체이고, 남성은 그것을 받는 것이 당연한 객체로 굳어졌다는 점. 한 직장 여성은 "우리 회사만 해도 여직원 10여명이 각자 작건 크건 초콜릿을 남자 직원들에게 선물하는데, 정작 문제는 여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건네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다는 것이고, 아울러 누구에게 어떤 초콜릿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그저 주니까 받는 식의 식상한 허례허식으로 변질된 느낌을 준다"고 털어놨다.
회사원 이모(29)씨는 "누구에게 어떤 마음이 담긴 초콜릿을 받았느냐를 말하기에 앞서 몇 명에게 얼마나 많은 초콜릿을 받았는지를 따지는 세상에서 굳이 내가 동참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자기가 좋아서 연인이건 직장 동료이건 선물하는 데는 이의를 달 필요가 없지만 '남들은 다 주는데 너는 왜 안주냐'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성 때문에 더욱 선물하기가 싫어진다"고 말했다.
'초콜릿을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의 유래는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덕분인지 일본인들은 똑같이 건네는 초콜릿에도 확연한 의미 차이를 둔다. 일본말로 '데즈쿠리초코', 즉 수제 초콜릿을 최고로 친다. 아무리 값비싼 초콜릿을 건네더라도 누군가 정성을 담아 만든 수제 초콜릿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에 비해 '기리초코', 즉 '의리상 주는 초콜릿'도 있다. 직장 동료의 눈총에 마지못해 건네는 초콜릿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겠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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