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더블 스피크

'인종청소'라는 용어는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인종 우생학자들에 의해 일반화됐다. 인종 가운데 열등한 표본은 전선의 총알받이로 보내고 우수한 표본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알프레드 플뢰츠는 1905년 '인종청소를 위한 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예나대학 인류학 교수였던 H.F.K 귄터는 1920년 히틀러를 감명시킨 '독일국민의 인종청소'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보호해야 할 북유럽 인종은 크고 힘이 세서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선에 배치돼 오히려 많은 타격을 받게 된다며 전쟁을 반대했다. 가관인 것은 그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청소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청소는 더럽고 쓸모없는 인종을 걸러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된다. 인종청소를 이렇게 규정하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필요 없어진다. 하지만 인종청소의 본질은 대량학살이다. 이같이 본질을 감추거나 호도하는 언어 조작을 '더블 스피크'라고 한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명명한 이 말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해고를 '구조조정', 고용보장 장치의 약화를 '노동시장 유연성', 빚 대신 '신용'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더블 스피크는 특히 정치권력이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미 국무부는 세계인권현황보고서에서 '살해'를 '불법적이거나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로 표현했다. 1차 걸프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폭격'을 '목표물에 대한 서비스', 표적 가운데 인간은 '부드러운 목표물', 건물은 '딱딱한 목표물'이라고 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비밀 포로수용소에서 자행된 6가지 고문기술이 ABC방송에 의해 폭로되자 '정보획득을 위한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둘러댔고 미국 정부는 '공격적 심문'이라고 했다.('선샤인 논술사전', 강준만)

정부와 지자체의 문서나 자료에서 '신빈곤층'이란 말이 사라지고 '위기 가정'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이뤄진 일이다. 현 정부 들어 빈곤층이 늘어났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빈곤층'을 '위기 가정'으로 바꾼다고 해서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층 양산이 그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호도해서는 제대로 짚는 정책도, 국민의 지지도 얻을 수 없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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