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 ⑫퇴계 이야기

▲ 퇴계의 가르침은 지금
▲ 퇴계의 가르침은 지금 '안동학'이라는 지역 유일의 학문으로 계승되고 있고, 퇴계 정신의 산실인 도산서원의 선비문화수련원에는 해마다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이 안동을 넘어 한국의 정신을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 찾고 있다.
▲ 퇴계 맏며느리 묘. 맏며느리를 아끼는 퇴계의 마음과 시아버지를 존경하는 며느리의 마음이 4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퇴계 맏며느리 묘. 맏며느리를 아끼는 퇴계의 마음과 시아버지를 존경하는 며느리의 마음이 4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도산서원의 70년 된 매화에 올봄 첫 꽃망울이 터졌다. 퇴계는 평생 매화를 극진히 사랑했고, 매화를 주제로 한 시도 수없이 남겼다.
▲ 도산서원의 70년 된 매화에 올봄 첫 꽃망울이 터졌다. 퇴계는 평생 매화를 극진히 사랑했고, 매화를 주제로 한 시도 수없이 남겼다.

안동을 이야기할 때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 없다. 일행은 퇴계 선생을 어떤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지 고민스러웠다. 퇴계종택, 계상서당, 도산서원 등을 둘러보면서 그 실마리를 찾아갔다. 지금의 우리가 퇴계에게서 배워야할 진정한 가치에 취재의 초점을 맞췄다. 대성리학자 퇴계보다는 '우리 이웃이자 자연인으로서 퇴계'가 지금 우리가 배워야할 가치가 아닐까.

퇴계종택을 지나 이육사 문학관을 가기 전 조그마한 야산 입구에 퇴계의 묘가 있다. 그러나 퇴계 묘 아래 맏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가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봉화 금씨는 봉화지방의 서슬 퍼런 양반가문의 규수였고, 퇴계 가문은 가난했다. 어느 날 퇴계가 사돈댁에 갔다가 금씨 문중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고, 이를 안 이씨 문중 사람들은 분개해 들고 일어났으나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가문의 명예란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요,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사돈댁의 귀한 따님을 며느리로 맞은 터인데, 만약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며느리가 얼굴을 들 수 없지 않는가"라며 사돈댁의 일을 불문에 부치고 며느리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넓은 마음에 감동해 평생 시아버지를 받들고 후일 세상을 떠날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시아버님 생존시에 내가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사후에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죽거든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퇴계 사후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까지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사랑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경(敬)이다. 퇴계가 자신의 학문을 총결산한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경은 성학의 처음이자 끝 '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의 학문은 경의 정신으로 일관돼 있다. 경은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에서만 자리하는 것보다는 생활과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전천후 정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퇴계는 평생을 경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 바쳤고,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과 문중 사람에 대한 꾸짖음도 경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 아닐까.

퇴계는 제자들에게 벼슬보다는 사람됨을 가르쳤다. 퇴계가 계상서당(퇴계종택 가기 전에 있는 조그마한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 과거에 응시하는 제자가 하나도 없었다. 나라에선 이를 수상히 여겨 다른 사상을 가르치지 않을까 의심해 밤에 감사를 몰래 보내 엿듣게 했다. 하지만 이 감사는 퇴계의 가르침에 스스로 깨우쳐 감사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제자로 입문했다고 한다.

퇴계는 당시 관학인 향교와 국학은 과거 공부에 주력해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는 반면 서원에서의 순수한 학문 연구에 주안점을 뒀다. 하지만 당시 사림들의 출세 방법이 과거를 통한 벼슬밖에 없어 퇴계의 아들과 손자조차도 과거에 관심을 가져 당시 오늘날의 진학지도학원 같은 성격의 사설학원에 다닐 정도였다. 퇴계는 문장 수련에만 힘쓰는 손자를 나무라기까지 했고, 손자가 하도 딱해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시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결국 아들과 손자는 퇴계의 가르침이 옳다고 여겨 되돌아왔고, 퇴계의 실천 중심의 학문은 후일 전국의 수많은 사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영남학파라는 대학맥을 형성하게 됐다.

퇴계의 가르침은 또 하나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퇴계 문하에 들어오려는 학생 두 명이 있었다. 퇴계는 학생들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 서당이 아닌 다른 거처에 머물도록 한 뒤 아이를 시켜 행색을 보고 오라고 했다. 당시는 여름이어서 한 학생은 갓과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반면 다른 학생은 의관을 갖춘 채 꼿꼿하게 앉아 있더라고 퇴계에게 고했다. 퇴계는 저녁 무렵 아이에게 다시 가서 행동을 보고 오라고 했다. 목욕을 한 학생은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의관을 갖춘 학생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다고 고했다. 이튿날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입문을 허락한 반면 꼿꼿한 학생은 되돌려 보냈다. 나중에 아이가 의아해 퇴계에게 여쭈니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꾸밈이 없는 반면 꼿꼿한 학생은 뭔가 감추는 게 많더라고만 말했다. 세월이 흘러 목욕을 한 학생은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고, 꼿꼿한 학생은 한때 조선의 조정을 뒤흔든 권력자가 됐다.

퇴계의 '사람됨'론은 스스로에게도 엄했다. 조선 명종은 65세의 퇴계에게 전교를 내렸다. 명종과 몸이 편치 않은 퇴계는 수 차례 전교와 병든 몸을 놓아달라는 사직의 글을 주고 받았고, 명종은 사직 윤허는커녕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은 물론 성균관 지사 등 여러 벼슬까지 겸임시켜 상경을 독촉했다. 결국 퇴계의 사직 간청에 명종은 병이 낫는 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해 신하들에게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의 시를 짓게 하고, 퇴계가 머물고 있는 도산의 풍경을 그려오게 해 병풍을 만들어 두고 보았다고 한다.

퇴계의 가르침은 오늘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김휘동 안동시장은 "2002년 7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설립되면서 서원 건립 428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사당 참배를 허용했고, 선비문화수련원을 방문하는 수천, 수만의 내외국인들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종규기자 안동·엄재진기자 사진·정재호기자

자문단 김휘동 안동시장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 박점석 안동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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