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처형의 편지

맞춤법 틀려도 만인의 심금 울려, 시인인 나도 아직 저런글 못 써봐

"먼저 가신 님은 받아 보십시요 오랜 만입니다 버써 세월이 삼십연이 다 되엿구나 십연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대 고향을 그르케도 이저소 너무도 소식이 없어 한자 적어 봅니다 간다는 말도 없이 온다는 기약도 없고 너무너무 무정 하게도 가신님아 나는나는 어쩌라고 팔십 두살 잡수신 받깥 어른게시고 어린 자식 사남매를 두고 어른은 잘 묘시라는 말도 없이 아이들은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된다고 하지도 안니 하고 가족은 잠재워 놓고 눈을 깜으면 나는 어찌 하라고 이러한 큰짐을 지워 놓고 뭐 당신은 오십도 못살고 이세상을 이별이 왠 말이고 나는 당신이 너무너무 불쌍 하고 원통 해서 미치고 환정할것 갇다 어쩌면 좋을까 말이나 해주소 나는 당신이 너무 너무 보고십다 이심정은 누구에게 알여 줄고 말도 못 한다 편지라도 소식이나 보내 주소 한국이나 외국이나 어느 곳에 있다는 열락만 들으면 이세상에 어디라도 찾아 가게소 철이라도 갈 수있고 말리라도 찾아 갈수 있는데 당신만 찾으면 온갓이야기 다 할수 있는데 소식이 깜깜 무소식이다 전화로 열락 하세요 전화가 아니되면 편지라도 보내주소 나는 편지는 썼지만 주소을 몰라 못부친다 이방 중에 형제들아 우리 남편 주소 좀 알려 다오 편지나 좀 부처 보자 책장에 왜 눈물이 떨어 지노 할일이 없어 노이 온갓 짓을 다 한다 스고보니 많사가 헌 일이세 글씨는 못썼지만 모두들 이해 해주소 청청 하늘에 잔 별도 많타 요네 가슴에 잔수심도 많타 이만 끝이다"

그저께 저녁 처가 식구들이 참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처형이 느닷없이 위의 편지를 품에서 꺼내 구슬픈 목소리로 읽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형제자매들이 모두 '엉머구리'같이 울어대는 바람에, 웃음꽃이 만발하던 자리가 갑자기 눈물의 바다로 돌변했던 것이다.

올해 일흔둘인 나의 처형은 일찍이 소학교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전혀 없었던 분이다. 그러므로 한글조차도 깨치지 못한 채 열아홉 살의 앳된 나이에 산 넘고 물 건너서 시집을 갔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글이 넉넉했으므로 세상살이에 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으며, 글은 몰라도 예의범절만은 손금 보듯 훤하여 주위 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행복한 생활은 처형의 나이 마흔넷 되던 해에 문득 막을 내리고 말았다. 건강하던 남편이 어느 날 한밤중에 난데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청천벽력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지만, 여든두 살 되신 시아버지 모시고 어린 자식 넷을 키워야 했으므로 마냥 오래도록 슬픔에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늙으신 시아버지가 혼자 집에 계시면 답답해 하실까봐, 밭일을 갈 때마다 등에 업고 가서 밭둑에다 모셔놓고 일을 했다. 이 논 저 논으로 옮겨갈 때도 그때마다 업어다 모셨더니 효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아이들도 탈 없이 쑥쑥 자라서 제 살 자리 제각각 다 잡았다.

하지만 글 잘 알던 남편이 갑자기 떠나자 편지가 와도 어디서 온 편지인지 알 수도 없고,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도 없는 것이 짜장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먼저 간 남편에게 부치지도 못할 편지라도 써서 만장 같은 그리움을 풀어보고 싶었지만, 글을 모르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처형은 환갑이 지나서야 비로소 작심을 하고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보다시피 아직도 문법과 맞춤법이 엉망이다.

그러나 감동은 원래 절절한 마음에서 울컥, 솟는 것, 문법과 맞춤법이 뭐 그리 대수랴.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시인인 나도 처형의 편지처럼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아직 단 한번도 써보지 못했다. 바로 이 글만 하더라도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봐도 내가 쓴 부분은 결국 들러리에 부록 신세를 면할 수가 없으니,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박용래)

이종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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