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민·질투·열정…6가지 사랑의 시선

다른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김재혁 옮김/이레 펴냄

죽은 아내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비밀 서랍을 열어보게 된다. 이전에도 거기 아내의 비밀 서랍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열어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죽었고 나는 유품을 정리해야 한다.

비밀 서랍에는 아내의 숨겨둔 애인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나왔다. 아내는 그 남자 옆에서 웃고 있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는 주소를 추적해 아내의 애인을 찾아간다. 아내의 이름으로 그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만나기로 약속도 한다. 물론 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아내가 죽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와 친구가 된 나는 복수할 궁리를 한다.

그러나 그를 알아갈수록 아내가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미화하는 허풍쟁이에다 사기꾼이며 무능력자고 가난뱅이였다. 그럴듯한 주택가의 지하 단칸방에 세 들어 살면서 옷은 달랑 한 벌뿐이고, 구두를 아끼기 위해 늘 포장된 길로만 걸어다녔다. 이런저런 사람에게 이런저런 허풍과 거짓말로 빌어먹는 처지였다. 심지어 식사까지 얻어먹는 작자였다. 알고 보니 아내 역시 결혼할 때 가져왔던 많은 돈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그놈을 위해 썼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한마디로 아내의 애인은 '인간 쓰레기'였다. 복수를 생각했지만 복수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바로 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갈색 여인의 남편이오. 그리고 그녀는 죽었소.'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 후 그는 덧붙였다.

'그녀는 명랑한 여자였어요. 나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해 했어요. 그 이유는 내가 허풍선이에다 사기꾼에다가 인생의 실패자였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가 명랑한 여자였다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 남자를 향해 웃어보이는 아내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아내의 애인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연인, 그러니까 나의 아내를 극찬한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얼마나 고상한 사람이었는지,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가 얼마나 우아하고 멋있었는지…. 실제 그녀 모습이기도 하고, 실제 그녀 모습에 허풍을 잔뜩 보탠 것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나는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볼 줄 안다. 그래서 나쁜 점,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불만을 터뜨린다. 나는 효율성과 적법성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수하고 명석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정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허풍쟁이에다 가난뱅이인 아내의 애인은 다른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재된 '허구성'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삶의 사실성만 강조한다면 아내의 애인은 삶의 허구성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삶의 여러 부분을 고루 볼 줄 안다면, 그는 조금 밝은 부분을 매우 빛나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사람이 좋으면 무엇이든 예뻐 보이고, 싫으면 숨쉬는 소리조차 듣기 싫은 법이니까.)

지은이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삶의 사실성뿐만 아니라 허구성까지 들여다볼 줄 알 때 우리는 '삶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소설집 '다른 남자'에는 모두 6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려 있다. 어긋남, 연민, 질투, 이기적 열정, 근원적 그리움, 낯섦 등을 주제로 작가는 사랑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344쪽, 1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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