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느티나무 하숙집」/ 류인서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좋은 시를 읽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말들이 입 속에서 돌올하여 들락날락 솟구치거나 가라앉거나 회오리치는 느낌일까. 음악처럼 몸과 마음속 어딘가 환해지는 삼투압일까. 좋은 시란 자신과 호흡이 맞아야 한다. 자신이 굳이 시와 호흡을 맞추지 않더라도, 시가 들숨과 날숨의 방향을 독자와 일치시키는, 시인의 시를 빌리면 "나를 밟고 나를 지나 끝없이 나에게로 가는" 자연스러운 느낌! 근간 류인서 시집 『여우』 속에는 맞춤한 숨소리를 내는 시가 여러 편 있다. 그때 시의 아가미는 크게 열리고 크게 닫힌다. 좋은 시는 대체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음악을 필요로 한다. 느티나무 생태학이라고 명명할 「느티나무 하숙집」의 느티나무 역사 또한 사람의 역사와 겹친다. 다시 말하자. 좋은 시는 몇 개의 의미망이 겹쳐져 있다. 시 속의 느티나무는 나무이면서 느티를 닮은 생의 연대기이다.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이라는 마지막 연의 아련한 슬픔은 늙은 느티나무 수피와 겹친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 역시 어떤 생과도 나란히 비교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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