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 15-아미산 자락

옛날 지석묘가 있었던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부터 무당과 보살들이 많이 살아'무당골'로 불렸다. 그러다가 동화사 포교당인 보현사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전설에 따라 아미산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풍수 지리적으로는 비슬산에서 내려오는 생기가 아미산에서 맺혔다가 평지인 영남제일관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반월당에서 달서천으로 흐르던 물길이 가로막고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연귀산에 돌 거북을 앉혀서 생기를 북돋워 그 기운이 영남제일관으로 이어지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미산은 그만큼 대구의 풍수지리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 하겠다.

남산동, 현재 SK허브스카이 주상복합빌딩 자리에 옛 교남학교가 있었다. 교남학교는 한때 재단 부실을 이유로 폐교 통보를 받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조선의 역사와 말을 가르치면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학교이다. 민족시인 이상화가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고, 서양화가 서동진을 비롯한 이효상, 김상열 등이 무보수로 교편을 잡았으며, 이육사'이원조 형제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한솔 이효상이 재단 정상화에 나섰다. 대구 부자 서상돈의 아들이자 중추원 참의였던 서병조를 설득하여 이사장으로 참여케 하였다. 그는 거금을 투자하여 대붕교육재단을 설립하고, 1939년 대륜초급중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42년 한솔 이효상이 교장이 되었으며, 그 후 수성들로 이전하였다.

이전하고 난 그 자리에 상고예술학원이 있었다. 1952년 신문예 창조기의 우뚝한 시인 상화 이상화와 고월 이장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두 사람의 아호 가운데서 한 자씩 따와서 설립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90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는 구상 김동리 김동진 박두진 박종화 백기만 양주동 이은상 이효상 정비석 같은 예술인들이 있었다. 초대원장은 마해송이 맡았고, 강사로 조지훈 최정희 구상 유주현 박훈산 장덕조 등이 무보수로 야간수업을 진행했다. 이듬해 피란문인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시인 이설주가 원장을 맡았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 동부교육청 자리에 명신여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1910년 순종 황제의 하사금으로 개교하였다. 그러나 1911년 경영권이 천도교로 이관되었고, 1916년 사립 달서여학교로 거듭났다. 그 뒤 여러 차례 경영권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5년 김울산이 전재산을 기부해 학교를 인수하여 복명여자보통학교가 되었는데, 김울산은 권번 출신 기생이었다. 1927년 남산동에 현 교사가 준공, 이전하였고 1941년 복명국민학교로 개명하였다.

오늘날 반월당 네거리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달구벌의 동서와 남북을 연결하는 드넓은 도로가 교차하고 있다. 주변에 새로운 상업용 빌딩들이 마치 비온 뒤에 죽순이 돋아나듯 치솟고 있다. 유명 백화점과 주상복합 건물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다. 그 옛날 아미산의 흔적은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 발전하는 시대에 굳이 옛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달구벌의 기운이 맺힌 의미 있는 곳이다. 역사와 추억을 길동무하며 한번쯤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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