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12년, 이사부에 항복한 우산국(于山國)…독도의 역사

[여기는 독도] 역사①-지증왕 13년

▲ 4월 말 이후 괭이갈매기 산란철을 맞은 독도는 섬 전체가 갈매기로 하얗게 뒤덮여 있다. 서도의 물골 고갯길 곳곳에도 갈매기가 둥지를 틀어 알을 부화하고 있다.
▲ 4월 말 이후 괭이갈매기 산란철을 맞은 독도는 섬 전체가 갈매기로 하얗게 뒤덮여 있다. 서도의 물골 고갯길 곳곳에도 갈매기가 둥지를 틀어 알을 부화하고 있다.

독도는 울릉도 품 안에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울릉도에 인간이 거주한 이후부터 모자(母子)관계가 되었다. 울릉도 사람들은 황금어장인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생활방편으로 삼았다.

울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생활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독도 역사를 울릉도 역사와 동일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렇듯 선조들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먼 옛날 경북 청도에는 이서국이 있었다. 이서국은 유례 이사금 14년(297년)에 사라(신라의 옛이름)의 도읍 금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서국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그 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흩어져 퇴각하던 이서국의 공주와 잔병들은 동해의 어느 바닷가에 당도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우르뫼'(울릉도의 옛이름)로 고기잡이 나갔다가 만선 깃발을 달고 들어오는 10척의 어선을 만난다.

150여명의 패잔병들은 어부들에게 창과 칼을 들이대고 배를 부리게 하여 우르뫼로 달아난다. 이들은 항해 도중 거센 비바람을 맞아 사흘 밤낮을 싸운 끝에 9척의 배가 무사히 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들이 공주를 중심으로 우르뫼에 나라를 세우니 곧 우산국(于山國)이다.(김탁환 저 '독도평전' 인용)

사소한 역사의 단편 같기도 하고, 소설적 허구를 담은 설화 같기도 한 이 글의 근원은 1963년 국립박물관 '울릉도 고분 조사 보고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 고분은) 낙동강 동안(東岸)의 삼국시대 석관묘와 주체구조에 있어서 유사하며 신라 중심지 묘제가 아니라 가야지방 묘제와 연결되며 위의 사실은 우산국이나 주민의 출지가 신라계가 아니라 가야계라는 것을 말한다.'

이 고고학적 성과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결국 청도의 이서국 사람들을 울릉도의 원주민으로 상정(想定)하게 된 것이다. 또 한가지 역사적 사실은 우산국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사실도 고려되었다.

우산국과 신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란히, 그 멸망에 대한 것이 올라 있다. 특히 삼국사기 권4, 지증왕 13년(512년) 기록은 우산국의 최후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산국이 귀부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강릉의 옛 지명)의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지경(地境)의 면적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다가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된 뒤 우산인들은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력으로써 내복(來服)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계략으로써 복종시키기로 하였다.'

사서(史書)는 이어 나무사자를 만들어 전선에 싣고 가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위협하여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리 땅 독도'의 기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사실은 대중가요에서 인용되면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신라 장군 이사부' 시절부터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어디에도 독도에 관한 기록은 한 마디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독도의 역사가 이때부터 연원됨은 어떤 이유일까?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라는 두 섬이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에는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于山島)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마츠시마)'라고 적고 있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이런 자료를 근거로 "독도는 지증왕 13년부터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세종실록과 만기요람은 독도가 오늘날 울릉도 주민들의 정서상 모자(母子)관계의 섬뿐만 아니라 사료로써 예로부터 모자관계의 섬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듯 독도는 울릉도 안에 있었던 것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