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기는 독도] 역사⑤-일본 막부의 재확인

▲ 국립수산과학원 소속 탐구 20호(880t급)가 독도 근해에 머물면서 정기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해저에서 채취한 샘플을 분류하고 있는 포항의 독도수산연구센터 홍병규(맨 앞쪽) 연구사.
▲ 국립수산과학원 소속 탐구 20호(880t급)가 독도 근해에 머물면서 정기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해저에서 채취한 샘플을 분류하고 있는 포항의 독도수산연구센터 홍병규(맨 앞쪽) 연구사.

조선 숙종의 여인, 패덕(悖德)의 장희빈과 부덕(婦德)의 인현왕후는 아직도 독도 역사 속에 살아 있다. 남인과 서인, 당쟁의 대리전이 되어버린 두 여인의 피바람은 울릉도·독도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일본 외교에서 온건론의 남인이 강경론의 서인한테 꺾임으로써, 울릉도·독도 운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운명만큼이나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안용복을 호송해온 다치바나(橘眞重)가 받아간 외교답서 즉 '울릉도가 조선 지경(地境)'이란 내용을 본 일본은 울릉도 점거 야욕을 노골화한다. 대마도 도주 종의윤(宗義倫)이 다시 다치바나를 조선에 보내 억지 주장을 한 것.

"죽도는 옛날부터 일본에서 지배해 왔는데 조선 측이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의 섬이라고 하니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급히 이 서장(書狀)을 보내니 지난번 답서에서 울릉도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다시 보내주십시오"(일 문서 '통함일람')

숙종은 남인세력을 등에 업은 장희빈 치마폭에 싸여 인현왕후를 내친 것에 가책을 느꼈다. 그럴 즈음 서인들은 폐비 인현왕후를 복위하려다 남인의 우의정 민암 등에게 들켜 고변당하자 역모로 맞고변한다. 이때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민암을 사사(賜死)한 후 남인들을 축출하고 전격적으로 서인들을 등용한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일컫는다. 갑술환국으로 새 영의정에 오른 서인의 영수 남구만은 지난해 남인의 대일본 온건론을 정면 비판하고 강경대응을 주장한다. "'지난번 울릉도가 조선 지경' 운운한 회답서는 그 내용이 모호하니 마땅히 사신을 파견하여 그 답서를 받아오고 책임자를 벌줄 것"을 상(上)에 아뢴 것.

숙종이 윤허하여 조선 조정은 유집일을 시켜 다시금 안용복을 심문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막부는 울릉도(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쟁은 대마도주 종의윤의 술책에서 비롯됨이 드러났다.

이럴 즈음 다치바나가 '울릉도' 문구 삭제를 요구하는 서계를 들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조선 조정은 앞의 회답서를 취소하고, '울릉도가 바로 죽도로서 한 섬이 두 개 이름을 가진 것뿐이며 곧 조선 영토'임을 천명했다.

아울러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막부에 보고하고 앞으로는 일본 어부가 울릉도로 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답서를 주었다. 다치바나는 끝내 조선의 답서 받기를 거부하고 이듬해까지 부산 왜관에 머물며 '울릉도' 삭제를 요구했다.

강경대응에 나선 조선 조정은 다치바나의 억지를 무시하고 그해(1694년) 가을 삼척첨사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의 실태를 조사하게 한다. 그 결과 울릉도는 1, 2년에 한 번씩 관리를 보내 섬을 수색하여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짓고 이때부터 '수토(搜討)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숙종 21년(1695년) 조선과 일본 간의 대치로 긴장 관계가 고조되자 대마도는 지금까지 교섭 전말을 막부에 보고한다. 막부는 즉시 안용복을 납치해갔던 조취번(鳥取藩)에 두 섬의 영유 여부를 묻는 질의서를 보낸다.

에도(江戶)에 있는 조취번 집안에서는 질의서를 받은 다음날 "죽도는 인번·백기주의 부속이 아닙니다. 죽도(울릉)·송도(독도)는 물론 그 밖에 어떤 양국(兩國·일본 내의 인번과 백기주를 지칭)의 부속섬도 없습니다"라는 회신을 한다.

질의응답 결과 막부는 죽도(울릉도·송도 즉 독도는 부속섬으로 포함)는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조취번과 대마도에 명령한다.('울릉도와 독도' 송병기 저)

"죽도는 일본 호키주로부터 160리인데 비해 조선으로부터 거리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우니 조선영토라고 볼 수 있고, 일본인의 죽도 도해를 금하며, 이 내용을 대마도 도주가 조선에 전하도록 하고, 대마도 도주는 돌아가면 형부대보(刑部大輔)를 조선에 파견하여 이 결정을 조선에 알린 후 그 결과를 관백에 보고하도록 하라."(일본태정관 편 공문록)

일본 막부의 결정은 안용복 피랍, 도일과 대마도주의 침탈야욕으로 야기된 죽도(울릉도) 영유권 논쟁이 일본 측에 의해서도 다시 한번 조선 영유로 인정된 것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역사의 강물은 그 지향하는 바가 없다. 다만 수많은 지류를 모으고, 지세를 따라 흘러갈 따름이다. 때로 역사의 물머리는 예기치 않은 지류를 만나 격절되기도 한다. 300여년 전, 숙종이 계속 장희빈의 치마폭에 싸여있고, 남인의 대일본 온건대응이 유지되었다면, 독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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