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이 목소리 듣는가

'문제집 한 권 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버스비 걱정 없이 통학하고 싶어요.',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에 다니고 싶어요.'

본사가 대구시와 공동으로 벌이고 있는 '2009 희망나눔 캠페인'에 실린 기사 제목들이다. 지난달 26일 첫 보도된 뒤 16일까지 4차례 실렸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결손가정이거나 혹은 부모가 병으로 경제력이 없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중'고등학생들이다.

첫 기사가 나가자 많은 분들이 신문사와 대구시를 직접 방문해 성금을 전달하거나 전화로 관심을 나타냈다. 이미 대구시의 희망나눔 홈페이지(hope.daegu.go.kr)에는 많은 분들이 도움 의사를 밝혔다. 주무 부서인 행정자치과는 업무가 힘들 정도로 전화벨이 울린다고 했다. 어떤 분은 과일과 반찬을 전달하겠다 했고, 어떤 분은 무료 과외를 自請(자청)했다. 또 어떤 분은 여유가 좀 있으니 원하는 학생이 있으면 집을 무료 임대하겠다고 했다 한다. 머뭇거리며 MP3 플레이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던 윤지(가명'여'14, 본지 9일자 4면 보도)는 여동생 현지(가명'11)와 함께 MP3 플레이어를 선물받았다.

본지는 '이웃'(2001년), '아름다운 함께 살기'(2002년)를 거쳐 2005년 1월부터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의 이야기를 매주 한 차례 보도하고 있다. 독자들은 적게는 500만, 600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매주 성금을 보내왔다. 심지어 어떤 때는 1주일에 5천만 원이 넘는 돈이 모인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아는 어떤 분은 20년 이상을 지체부자유아나 홀몸노인 등을 돌보며 살고 있다. 자신도 넉넉지 않으면서 늘 어려운 이웃을 찾아다닌다. 지금도 자원봉사자와 식당을 운영하면서 모든 수익금을 노인 식사 배달에 쓴다. 운영비는 회원들이 조금씩 도와준다. 식당 이름까지 '서로 돕고 사는 집'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또 시킨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좋아서, 그저 안타까워서, 남을 돕는 일이 스스로를 돕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런 분들이야말로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다.

이런 분들이 있는 반면 나라를 망가뜨리겠다고 작정한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서로 국민을 위한다며 敵(적)인 상대를 쳐부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고 한다. 해묵은 논쟁을 일삼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 이야기다. 말이 좋아 보수'진보이지 旣得權(기득권)을 지키려는 極右(극우) 세력과 이를 뒤엎으려는 極左(극좌) 세력의 헤게모니 다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가 만든 모습이다. 극우와 극좌의 틈바구니에서 中道(중도)와 민주주의는 실종됐다. 대화는 변절, 협상은 배신 행위가 된 지 오래다.

500만 명으로 추산된 추모객이 진보 측의 주장처럼 모두 親盧(친노) 인사는 아닐 것이다. 功過(공과)야 있지만 전 대통령으로서, 한 인간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슬픔으로 참여한 이도 많다는 얘기다. 추모 행렬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국민 모두가 反盧(반노)인사가 아닌 것도 당연하다. 가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린 사람도 많다. 여기에 보수'진보가 설 땅이 어디 있는가?

많은 국민은 하루하루 살기가 팍팍하다. 보수'진보로 패거리를 가를 힘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주변에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삶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면서도 돕는 손부터 먼저 내민다. 이들은 國民葬(국민장) 추모행렬에는 못 끼었지만 격의 없던 서민 대통령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또 경제를 살리겠다고 해 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소박한 마음은 보수'진보라는 虛妄(허망)한 論理(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다. 마땅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클 이유가 없다.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理念(이념)이나 政府(정부)보다 길고 활기찬 생명력을 가졌다. 이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한다.

정지화(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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