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동의 전시 찍어 보기] 맬랑꼴릭한 주제의 감각적인 표현

권정호 초대전 / 수성아트피아 / ~6.28

한때 미국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던 '회화적 추상'은 미술에서 극단적인 순수성을 주장한 비평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회화는 그 매체 고유의 속성에 따라 평면성에 입각해야 하고 그 외 주제나 이야기를 상상할만한 어떤 형상적인 표현 행위도 외도로 간주했다. 철저하고 일관된 추상에 대한 요구는 고의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구성마저도 연극성이라고 해서 불순하게 봤다. 자동 기술적이고 무의식적인 붓놀림이 특징인 가장 자율적인 회화가 역설적이게도 지적이지만 억압적인 이론과 궤를 같이 한 셈이다. 그러나 화가의 표현 충동은 언제 어디서나 사변적인 논리의 도그마를 찢고 나올 수밖에 없다.

수성아트피아의 초대로 열리는 권정호 선생의 개인전은 지난 한 시대 그의 예술적 실험과 도전의 기록을 함께 펼쳐 보인다. 회고전 형식의 이번 전시는 1980년대에 제작된 3점의 유화에서부터 시작해 최근의 디지털 설치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편력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현대미술 속의 한 단층을 새롭게 조망하게 하는 바가 있다. 바로 1983년 작 무제(untitled)는 그때까지 제작해왔을 비대상적인 추상표현 작업의 한 전형이다. 그러나 소리(sound)라고 제목을 단 이듬해 작품에는 스피커 모양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시각적으로는 미묘한 차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두 작품의 의미상 간격은 매우 크게 느껴진다. 그 변화가 보다 명확해진 것은 같은 제목의 1987년 작에서 확인되는데, 화면 좌측 상단에 간략한 드로잉으로 세 개의 해골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써 이후 그의 모든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할 바로 그 모티프다. 추상표현주의자로부터 뉴페인팅 쪽으로의 이 최초의 변화가 뉴욕의 프랫(Pratt)에 유학할 시기에 일어났던 것과 그 중심에 사적인 경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상징적인 모티프가 개입한 것은 결코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자율적이던 회화에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회화로의 전환에는 누구보다 제스퍼 존스의 영향이 보인다. 존스는 매우 지적인 화가지만 형이상학적인 추상을 감각적이고 상징주의적인 회화로 바꾼 사람이었다. 그의 교훈이 드러나는 또 한 곳은 주제에 대한 성찰을 개념적 사유를 통해서 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화가는 미술의 언어로 해야 한다는 자세에서다. 해골이 등장하는 권정호의 모든 그림에는 죽음이나 허무에 관한 물음이 일으킬 멜랑콜릭한 분위기 보다 항상 색채나 터치의 감각적인 표현이 더 두드러진다. 그의 다양한 시도들을 보면 너무 열심이고 야심만만해서,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있는 노력으로 여겨진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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