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유신을 즈음해 일본의 대(對)조선 관계는 에도시대의 '교린(交隣)'에서 '정한(征韓)'으로 급선회한다. 조선정벌의 야욕은 운양호사건(1875년)의 포성으로 시작돼 경술국치로 완결된다. 그 격랑 속에서 '힘 없는' 조선은 영토지키기에는 오히려 삼엄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1876년)을 통해 조선연안 측량을 허가받은 후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울릉·독도에도 일본 배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1881년에는 왜인들이 월경하여 울릉도에서 나무를 베어내다가 수토관(搜討官)에게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울릉도를 수토정책으로 지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1882년 영의정 홍순목의 방안에 따라 개척정책으로 돌아선다. 즉 울릉도에 거주할 민간인을 모집, 개간을 권장해 5년간 면세하고 영, 호남의 조운선을 울릉도에서 조선(造船)토록 한 것. 이로써 조선초 태종의 쇄환정책 이후 처음으로 민간이 합법적으로 섬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1883년 조선은 평소 울릉도 개척을 주장한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백춘배를 종사관으로 임명하고, 함양인으로 입도한 지 10년이 되는 전석규를 울릉도 도장(島長)에 앉혔다. 김옥균의 '동남제도개척사' 임명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를 포함한 개척을 염두에 둔 조선의 의지였다.
조정에서 시행한 모민(募民)에는 목수·대장장이 각 2명을 포함해 16가구 54명이 응했다. 이들은 4척의 배로 종잣소 암수 두 마리, 쌀 60석, 콩 5석, 가마솥 2좌, 철물 40근, 총 3자루, 창·칼 각 4자루 등을 싣고 울릉도로 향했다. 이들 개척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정착해서 살고 있던 거류민 141명과 함께 울릉도를 개척해나가기 시작한다. 모민의 정착을 계기로 일본은 그 때까지 월경하여 벌목하고 고기잡이하던 자국인 255명을 1883년 9월 '월후환(越後丸)' 배로 데리고 돌아갔다.
이후, 일본인들은 간헐적으로 목재를 밀반출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그 규모가 미미했다. 그러나 5년여가 지나자 전복을 채취하는 어민들의 출몰이 본격화되고, 심지어 가족이 딸린 일본 어민 1명이 울릉도에 입적하여 살기를 원하는 일까지 생겼다. 1889년 여름에는 어부 186명과 어선 24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선단이 도방포(현 도동)로 들어와 사기그릇을 팔고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1895년쯤에는 일본인 잠입이 점차 늘어나 200여명이 섬에 머무르면서 불법으로 느티나무를 베어내는가 하면 도민(島民)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작폐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제국은 1899년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시찰위원으로 파견했으며 일본 측도 조사위원을 파견했다.
우용정은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1900년 6월 귀경하여 실태와 대책을 담은 보고서를 내무대신에게 올렸다. 우용정은 "울릉도는 이미 호수가 400여호에 달하고, 개간하여 만든 밭이 1만여두락에 이르며, 감자, 보리의 수확이 각 2만포가 되니, 내륙의 여느 산골 군과 견주어도 군 형세로 손색이 없다"며 군 승격을 건의했다. 우용정은 그해 10월에는 정식으로 의정부에 군을 설치하는 것과 관련한 '청의서(請議書)'를 제출했다.
우용정의 청의서는 의정부 전원일치 의결을 거쳐 1900년 10월 25일 광무 4년 칙령(勅令) 제41호로 황제의 재가를 받아 10월 27일 관보(官報)에 게재, 반포됐다.
칙령(勅令) 제41호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한 건(件)
제1조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附屬)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官制)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等)으로 할 사(事)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事)
…
제6조 본령(本令)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사(事)
광무(光武) 4년 10월 25일 봉(奉)
칙(勅) 의정부의정임시서리 찬정(贊政)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제2조의 관할구역. 광무 4년 칙령 제41호 제2조에는 분명 울릉군이 '석도'를 관할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칙령이 정한 구역 '석도'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독도임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아는 것이다. 돌섬=독섬=독도의 전라도식 표현과 한역(漢譯)으로 나타나는 표기의 변화다.
1900년 대한제국은 독도를 우리의 땅이라고 명확히 천명했다. 이 하나만의 사실로도 일본이 주장하는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획득했다는 '무주지선점론'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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