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살림출판사, 2007
한국으로 유학 온 어느 미국 학생의 에피소드입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 학습과정을 마친 유학생은 처음으로 지방 나들이를 계획합니다. 그 첫 번째 방문 도시로 대구를 선택한 것은 고속철도(KTX)로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투리도 소화할 수 있다는 한국어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그는 역사를 빠져나와 동대구역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기다림이 지루했던지 유학생을 발견한 할머니가 밝은 표정을 짓습니다. 용기를 얻은 유학생, 한마디 건네 볼 심산으로 어정쩡한 자세로 할머니에게 다가갑니다. 그 순간 팔공산행 버스가 오는 것을 발견한 할머니가 반갑게 한 말씀하십니다. "왔데---이!" 동방예의지국에 유학하면서 예의를 제대로 배운 미국 유학생, 공손히 대답합니다. "먼데이(Monday)" 유학생의 한마디를 들은 대구 할매, 그 인정에 그냥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친절하게도 다가오는 버스의 실체에 대해 설명합니다. "버스데이~", 유학생의 예의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버스에 오르는 할머니의 뒤통수를 향해 크게 외칩니다. "해피 버스데이(happy birthday)"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언어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다양함은 곧 애정이고 다정입니다. 풍성하다는 것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교감이 많고 희로애락이 크다는 증거입니다. 요즘 과학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여 매스컴이 언어를 단순화시키고 통일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사용하는 단어의 수가 줄어들고 기계적 언어가 추구하는 편리성에 부합하여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못내 아쉽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는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컴퓨터 채팅의 사이버공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초등학교 수준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단어 몇 개가 전부입니다. 말의 풍부함, 언어적 유희는 고사하고 주어와 술어조차 소멸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단순한 의사소통만을 위한 언어체계로서는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 사람의 말은 배우기가 만만치 않다고 느끼는 것은 한국어에 내재된 한국인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감정의 오묘함과 깊이 때문입니다. 그 심도 있는 사유들과 경험이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고, 그 함축된 결정체가 바로 사투리입니다. 흔히 사투리를 표준말에 대한 주변 언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표준말은 상위 개념의 중심언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단지 준거가 되는 말일 뿐입니다. 표준을 통일이나 획일화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두고 다양한 단어와 수식어가 스펙트럼처럼 존재할 때 언어는 그 자체로서 무지갯빛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 한국어에 구수하고 능청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나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투리를 세월이 만든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이상규 교수의 저서 '방언의 미학'(살림출판사, 2007)에 담겨 있습니다. '아제, 어디 가능교?' '아제, 어디 가여?' '아제, 어디 가니껴?', '음악'을 '엄악'으로, '쌀'을 '살'로, '경상도'를 '갱상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간디?' '알간디?' '가도만' '먹어 봉게' '웃응게' 등의 특수조사를 붙이는 전라도 사람들, 감히 대한민국의 '사투리의 수호신'이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는 분이 이상규 교수입니다. 그는 우리말을 하는 우리네 사람들에게 간곡한 당부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제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표준화에서 다원화의 관점으로, 자본 중심에서 변두리로 우리의 눈길을 되돌려야 합니다. 지난 세기 수수방관하여 잃어버린 인간 삶의 유산을 다시 복원하고 이를 불러 모아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강을 살려내고 사라진 새와 물고기가 다시 되돌아오도록 노력해야 하듯이, 소수의 언어인 변두리 방언의 미학이 우리의 일상 속에 소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