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때나 지금이나…' 농활, 땅과 땀은 변하지 않았다

수박밭에서 작업중인 학생들. 땡볕 아래에선 긴 옷과 밀짚모자가 필수다.
수박밭에서 작업중인 학생들. 땡볕 아래에선 긴 옷과 밀짚모자가 필수다.
영주시 안정면 대줄리에서 농활을 한 신문방송학과 황토농활대의 마을잔치. 마을잔치는 농활을 정리하는 자리로 농민들과 학생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자리다.
영주시 안정면 대줄리에서 농활을 한 신문방송학과 황토농활대의 마을잔치. 마을잔치는 농활을 정리하는 자리로 농민들과 학생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자리다.

"돼지우리 철거 작업에 갔습니다. 철거 작업이라서 당연히 돼지똥도 치우고, 똥이 몸에도 묻긴 했지만 그늘에서 작업해서 괜찮았습니다. 작업을 다 끝내고 나서 숨을 들이켜니까 공기가 다르더군요. 맑은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지 새삼 느꼈습니다."

"인삼밭에서 잡초 뽑는 일을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뽑다가 벌집이 거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건드려서 오른쪽 어깨에 두 방 쏘였습니다. 정신이 혼미하지만 내일 작업 나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감자밭에 나갔는데요. 일을 다 못 끝내고 와서 죄송했습니다. 참으로 주신 것도 다 못 먹었네요. 죄송하고… 내일은 일도 다 끝내고 참도 다 먹도록 하겠습니다."

"수박밭에 나갔습니다. 쪼그려 앉아서 고랑 사이에 널브러진 조그만 수박이랑 줄기를 주워 담는 일이었는데요. 허리를 많이 쓰는 일이라 몸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같이 일하시는 아주머니는 한 번 쉬지도 않으시더군요. 참 먹는 시간에 그분이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돈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지난달 27일 오후 11시. 경북 영주시 안정면 오계1리 마을회관 안은 뜨거웠다. 선풍기 한 대 돌지 않는 회관 안이어서가 아니었다. 대학생 농촌활동(농활) 참가자들의 일일평가 모습이 꽤 진지했기 때문. 평소대로라면 시원한 생맥주 한잔에 목을 축일 수 있는 토요일 밤이었다. 농촌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 허락된 것은 손부채뿐. 가만히 있어도 닭똥만한 땀방울이 얼굴에 맺히는 이날 밤, 이런 상황에 개의치 않은 듯 모기와 하루살이 떼의 움직임은 얌전치 않았다.

농활로 불리는 대학생들의 농촌 참여 행사는 소설 '상록수'에 나타나 있다. '브나로드'(V Narod:농촌으로) 운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 농활은 농촌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겐 농촌현실을 일부나마 알 수 있는 길이다.

지난달 27일부터 29일까지 경북대 사회대(사회복지학과, 정치외교학과) 학생들로 구성된 '달인농활대' 12명과 함께 경북 영주시 안정면 오계1리에서 농활을 체험했다. 내줄리에는 신문방송학과 '황토농활대'가, 대평리에서는 문헌정보학과 '황소농활대'가 농민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이들을 통해 변하는 농촌의 모습은 물론 사회 변화도 감지할 수 있었다. 농활이 가장 활발했다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농활을 겹쳐봤다.

◆2009년 '농활대'의 하루

농활의 시작은 오전 5시에 시작된다. 무엇보다 농민들의 생활 시계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 시간은 아니다. 농민들의 경우 한여름 뙤약볕을 피하기 위해 오전 4시 30분에 논이나 들로 나가기 시작해 오전 7시쯤 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다시 나가기 때문이다. 오전 5시에 일어나는 학생들은 소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다. 이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남짓. 하지만 다른 학생들도 오래 눈을 붙이지 못한다. 5시 30분이면 다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하고 마을회관 앞 등 숙소 인근을 청소한다. 주민들에게 깨끗한 인상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숙소를 빌려 쓰는 것이기에 깔끔하게 사용하는 것은 기본. 6시 30분이면 아침식사가 다 끝나고 하나 둘 오전 작업 준비에 나선다. 오전 7시가 되면 인근 주민들이 '일꾼'을 데리러 온다. 어찌보면 인력시장과 비슷하다. 학생들이 숙소 앞에 정렬해 있으면 농활을 연결해주는 주민이 그날 있을 작업을 학생들에게 설명, 자원자를 기다린다.

"수박밭에는 3명, 감자밭에도 3명, 인삼밭에는 2명, 우사(소 우리)에는 3명."

학생들 중에도 작업반장이 있어 작업에 투입될 학생들을 가른다. 몸상태가 좋지 않은 1명은 숙소에 남겨 마을에 있는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맡기고 나머지 학생들을 작업별로 나눴다. 이때부터 오전 작업이 시작되는 것.

학생들과 함께 수박밭 작업에 나섰다. 여섯 마지기(4천㎡) 넓이의 수박밭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했다. 이날 작업은 수박 고랑에 떨어진 작은 수박덩이와 잘려진 줄기를 수거하는 것. 잘 익은 수박 한 통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줄기 쳐내기가 뒤따라야 했다. 큰 줄기 하나에 수박 한 통 정도가 자라게 해야 하기에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 줄기와 작은 수박덩이를 솎아내는 것. 하지만 비가 올 경우 잘려나간 줄기와 수박덩이가 병충해를 일으킬 수 있어 반드시 치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체 고랑 수는 40개 남짓. 빈 비료포대에 솎아낸 것들을 담아 날랐다. 함께 간 학생들이 점심식사 당번이었기에 오전 11시까지 수박밭에서 일했다. 하지만 맡은 일은 반드시 마무리한다는 규율이 있어 오후에도 이 작업은 계속됐다.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얼굴과 팔, 다리에 묻은 흙만 대충 씻어내고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도 작업이 있기 때문에 굳이 샤워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후 3시까지는 점심식사와 자체 교양시간으로 이어졌다. 자체 교양은 총학생회에서 만든 교양자료를 이용했다. 농민들과 함께하는 농활에 농촌 현실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 '학자금 대출 이자지원 조례제정운동' '농업선진화 방안' '한국 농업의 역사' 등 농업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고, 대학생 자신들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작업 재배정이 있었다. 오전에 일을 끝낸 이들은 다른 일터로, 오전 작업이 남은 이들은 원래 하던 작업장으로 떠났다. 이들이 다시 한데 모인 것은 오후 7시 30분쯤. 저녁식사 당번이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나머지 학생들은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오후 8시부터는 '분반활동'에 나섰다. 어르신반, 청장년반, 여성농민반, 유아청소년반으로 나뉜 이들의 분반활동은 마을 주민들과 얼굴 익히기가 주목적이었다.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일하면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였다. 분반활동에 걸린 시간은 1시간 정도.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사이에 시간 차이가 9시간 가까이 나지만 오후 작업 중에 먹은 참이 있었기에 큰 시장기는 면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설거지까지 마치면 오후 10시 30분 정도. 이쯤부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작업 중 에피소드는 물론 작업을 하면서 느낀 점 등이 어떤 여과장치도 없이 쏟아진다. 내용 대부분은 농촌의 현실이 이런지 미처 몰랐다는 내용. 이들이 잠드는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서다. 농활 시작 닷새 정도가 지나면 허리 통증이 심해져 끙끙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그래도 오래 가지 못한다. 피곤했는지 앓던 소리가 엷게 코고는 소리로 바뀌는 데 10분 내외면 끝이다.

◆30년 동안 이어진 농활, 변치 않는 것들, 그리고 변한 것들

"벽에 등 기대지 마세요."

이들의 숙소에 들른 27일. 숙소 안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식사당번표, 분반활동표, 식사 전 부르는 노래가사 등 여러가지. 이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규율'. 9박 10일간 그들 스스로 약속한 것이었다. 엄격했다.

크게 ▷음식 남기기 없기 ▷담배 조심 ▷작업은 그날 끝내기 ▷취침시간 외에는 눕지 않기 ▷크게 떠들지 않기 ▷연애 금지 ▷운전 금지 ▷물놀이 금지 등이었다. 이 외에도 '벽에 기대지 않기' '텔레비전 켜지 않기'도 있었다. '인사 잘하기' 같은 것은 규율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이 같은 규율은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것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 농활에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차이점도 적잖았다. 1980년대 농활을 다녀온 김봉래(42)씨. 김씨는 학창시절과 졸업 이후까지 포함해 6차례 여름방학마다 농활에 참여했다고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농활에 참가했던 김씨는 "일부 주민들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반발하는 경우도 적잖았다"며 "경찰 등 정보기관이 촉각을 곤두세운 것으로 안다"고 회상했다. 실제 이 시기에 농활을 경험한 이들은 쌀과 찬거리를 농활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해둬야 했고, 심지어 일부는 폐가마저 없어 숙소를 텐트로 대체해야 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적도 있단다. 사진 찍는 것이 자칫 야유회처럼 오인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

아이들이 없고 노인만 남은 농촌현실도 과거와 다른 점. 이 때문에 일부 마을에서는 분반활동에 아동·청소년반이 없었다. 청장년반도 예순을 훌쩍 넘긴 이들이 대부분.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의 농활과 2000년대 농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참가자 수. 전체 9박 10일의 일정(마지막 1박 2일은 뒤풀이) 중 4박 5일씩 두 차례로 나뉘어 진행하던 선발대, 후발대, 그리고 9박 10일을 온전히 매조지는 상주팀으로 나뉘던 1990년대까지의 농활은 2000년대 들어 학생들의 저조한 참여도 때문에 유동적으로 변했다. 열흘간의 기간은 기존 다른 활동을 하고 있던 대학생들에겐 자못 부담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인농활대는 12명(경북대 전체 200여명 참여). 하지만 이 12명 가운데 4명은 주말이 낀 4일간 자리를 비운 뒤 다시 합류했다. 농활 기간 중에도 과외나 복지관 봉사 등 다른 활동도 겸하고 있었다. 2000년대 농활은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이용,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거나 혹 안전사고라도 일어나면 즉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기동성이 있었다. 마을버스나 학교버스를 이용해 마을까지 가야 했던 과거와 달리 농민들이 몰고온 1.5t 트럭이 주교통수단으로 바뀐 점도 차이. 작업 도중은 아니지만 일과를 마친 뒤 사진을 찍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사진 담당을 따로 둘 정도.

그래도 농활의 빠듯하고 고단함은 198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땡볕 아래 일하면서도 한 차례 언듯 불어오는 남실바람에 에어컨 못잖은 쾌적함을 느끼고, 평소엔 차려줘도 안 먹을 것 같은 빈찬의 아침밥상을 스스로 차려놓고 거뜬히 비워내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열흘간 반복하고 나면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기도 한다. '땅과 곡식이 이래서 소중하구나.'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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