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겁이 나서 고스톱 못쳐. 민화투 쳐."
민화투 삼매경에 빠진 노파들이 쉴 새 없이 화투판을 이어간다. 한창 치다가도 누가 선인지 묻는 건 다반사. 규칙으로 미리 정해놓은 점수가 나지 않으면 다음 판으로 넘어간다. 패를 섞는 동안 동네 온갖 정보들이 튀어나온다.
"복분자 꽃이 아직도 안 피네. 이파리에 벌개(벌레) 다 먹고.", "우리 집은 벌써 벌개졌는데."
각자 패를 받아들고 수다인지 정보 교환인지 모를 말들을 계속 쏟아낸다.
"ㅇㅇ네 집 요새 일 댕기나? 요즘 안 보이던데.", "그 집에 몸이 아프다 하면서 계속 어디 가긴 가는 거 같더라고."
어느 경로당을 가든 펼쳐지는 화투판. 살림 장만 목적이 아닌 치매 예방을 위한 것이라지만 점수 계산하기도 벅찰 것 같은 뇌는 뇌대로, 입은 입대로 움직인다.
"사람들 마카 모디가 어데 일하로 간다고 들에 일부릴 사람이 없어(사람들을 모아 일 시키러 보내는 바람에 밭에 일을 시킬 사람이 없어). 자꾸 사람들 간만 붇게 만들어가 우짤라고 그라는고(사람들의 욕구만 키워놓아서 어쩌려는지).", "정부에서 돈 푼다고 그러는건데 그것도 곧 끝난대. 얼른 화투나 쳐. 저거 안 먹고 뭐해."
희망근로를 두고 또 한 판 입씨름이 이어진다. 동네 정보와 민심의 흐름을 알려거든 미장원과 경로당을 가보라는 말은 정확했다.
누가 노인을 단순한 노약자라 일컫는가. 걸어다니는 도서관, 노인들의 집합소에는 노련함이 뚝뚝 묻어났다.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삶, 그리고 죽음까지. 노인들의 문화와 경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야할 곳이 경로당이기도 했다.
지난달 말 경북 영주의 한 시골 경로당과 대구 북구에 있는 주택가 밀집 지역의 경로당, 그리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경로당을 각각 찾았다.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할머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골은 배우자와의 사별과 남녀유별 의식이 아직 남아있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도시는 경로당보다 더 좋은 공간이 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자율적인 운영 방식도 공통 분모. 밥 담당, 청소 담당이 매일 정해져 있었고 어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경로당이 비슷하진 않았다. 도시와 농촌의 엄연한 차이가 있고, 도시에서도 아파트 경로당과 주택가 경로당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동네를 부처님 손바닥 보듯 하는 곳이 시골 경로당이라면 시사적인 부분과 복지 분야에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는 곳이 도시 경로당이었다. 동네 혹은 주민들에 대한 평을 할 때 표현하는 법도 달랐다. "감나무집에 사는 누구 아들"이라고 부르는 곳이 시골 경로당인 반면 "101동 머리 염색한 처자"라고 칭하는 게 도시, 특히 아파트 경로당이었다.
◆도시 경로당
-아파트 경로당
1일 오후 대구 북구의 한 아파트 경로당. 이곳에서는 노인 10명이 고스톱을 치거나 수다를 떨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시설도 좋았다. 노래방 기기는 물론 에어컨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인기(80)씨는 이곳 경로당의 회장 역할을 맡고 있어 매일같이 경로당에 들른다고 했다. 1998년 이 아파트에 입주가 시작됐으니 벌써 12년째 이 경로당을 지키는 터줏대감인 셈. 아파트 생활만 40년 가까이 했다는 이씨는 "도시 경로당의 경우 할아버지들이 거의 나오지 않고 할머니들이 회원의 대부분"이라고 귀띔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할아버지들의 경우 소규모의 갇힌 아파트 경로당보다는 인근의 복지관을 찾아 여러 동네에서 온 동년배들과 어울리기 때문. 딱히 몸이 불편하지 않는 이상 복지관까지 가서 바둑을 두기도 하며, 노래교실 등 배움의 기회가 많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독거노인은 하나도 없었다. 노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자식을 데리고 함께 살거나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경우도 적잖았다. 다만 이웃간 정을 느끼기 힘들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아래층, 위층, 혹은 맞은 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아파트의 특성상 집안 내 보안은 철저하다. 승강기에서 보는 것외엔 볼 일이 없으니 당연지사. 적어도 남들에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남의 집 사정을 당최 알 길이 없다. 이 때문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쓰기 애매하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대답. 하지만 아파트에 살고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이들은 "갇혀 사는 것 같지만 노인들끼리 살기엔 아파트만큼 좋은 곳도 없다"고 했다. 방범과 관리 측면에서는 아파트가 훨씬 낫다는 것.
이들 역시 고스톱을 치면서도 아파트 단지 돌아가는 얘기부터 시사 얘기까지 안 다루는 주제가 없었다. 고스톱은 점당 50원. 규모가 큰 것 같지만 3천원 이상 따면 모두 돌려준다.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조심스레 일자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단순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 몸상태는 우리가 제일 잘 알아. 누가 우릴 써주나. 일자리가 없잖아. 돈은 다들 벌고 싶어하지만 현실이 이런데."
오히려 이들은 잘 죽는 방법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9988234'가 뭔지 알아요?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죽는(4=死) 거예요."
-주택가 경로당
생긴 지 20년째인 대구 북구 복현동의 한 주택가 경로당을 찾은 것은 지난달 30일 오후였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고스톱과 윷놀이를 하는 할머니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손님이 왔다며 얼른 판을 접었다. 아직 퍼머에 검은 머리카락인 할머니도 있었지만 일부는 한눈에도 고령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쇠약해 보이는 할머니도 있었다.
경로당의 특성상 나이대의 편차가 심한 건 사실. 이곳 45명의 회원들의 최저 나이는 68세, 최고는 91세였다. 이 때문에 호칭 문제도 중요한 부분. 이들은 서로를 깍듯이 존대했지만 동년배끼리는 여느 10대들과 다르지 않을 만큼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남성이 여성을 부를 때는 '여사'라는 호칭을, 나이 차가 날 경우에는 성별 구분없이 성씨 뒤에 '어른', 이나 택호 뒤에 '할매'라는 말을 붙였다. '김씨 어른', '영양 할매' 같은 식.
여가 시간을 고스톱이나 윷놀이로만 보내냐고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도 1주일에 3번씩 1시간 동안 요가도 가르쳐주고 복지회관 등에서 행사가 있을 때는 원정 참가에도 나선다고 했다.
이곳 회원 중에도 할아버지의 비율은 10%를 넘었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의 비중이 압도적. 이유를 물었더니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오래 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속칭 말하는 주택가 경로당의 특징은 철저한 온정주의. 한 동네에 서너 곳의 경로당이 있다보니 한 번 발을 들인 경로당에 계속 출입을 하게 된다는 것. 이 때문에 '경로당 텃세'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기도 하지만, 실제 노인들은 한 번 간 곳에 계속 가게 된다는 게 이곳 경로당 노인들의 한목소리였다.
◆시골 경로당
지난 달 27일 찾은 경북 영주의 한 경로당은 가끔씩 관절 통증에 따른 '아이고, 아이고'라는 소리와 화투짝 맞아들어가는 '짝' 소리 외에 엄숙할 정도로 조용했다. 선풍기 두 대가 폴폴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회장님이 누구신지"라고 했다가 "그런 거 없다"는 명쾌한 핀잔을 들었다. 모인 노인 모두가 주인이라는 일종의 짧은 외침이자, 다짐이자, 사실이었다. 이곳으로 시집와 지금껏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인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고 당번을 정해 경로당을 스스로 정리한다는 것을 빼고 시골 경로당은 도시 경로당과 확연히 달랐다. 일단 시설부터가 그랬다. 최근에서 시에서 갖다줬다는, 선풍기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쿨쿨거리는 안락전동의자가 그나마 최신 시설. 화투판에서 빠진 할머니들은 의자에 누웠다. 물론 이곳 할머니들은 화투판이 끝나자 하나같이 드러누웠지만 말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노인들의 연령은 70~80세. 일부 노인들은 도시 노인들에 비교했을 때 연령에 비해 10년 정도는 늙어보였다. 마을에 90세 이상 노인도 있지만 거동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나이 차가 많이 나 함께 어울리진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
도시 경로당과 또 다른 차이라면 독거노인이 많다는 것이었다. 열이면 열,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들. 자식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있지만 신세지기 싫다고 했다. 화투를 치고 일어서면 '끄응'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온몸이 쑤시지만, 일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끼니도 잇기 어려운데도 말이다.
입에 발린 말로 "건강해 보이신다"고 했더니 반 코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수명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 지금부터 우리는 그냥 어떻게 잘 죽을지 그것만 연습하면 돼.
애들한테 짐 지우고 그러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혼자 있어도 죽을 때 애들 다 모일 시간만 벌어주고 마지막에 웃고 가는 거지 뭐."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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