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운 강' 시작을 알리고 있는 상주 사람들은 상주가 낙동강 경제의 중심 축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금은 강(江) 경제가 쪼그라들었지만 옛날엔 나라 경제의 버팀목이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강을 중심으로 한 수운(水運)은 바다의 해운(海運)과 함께 물류의 한 축이었다.
그러면 낙동강은 어느 정도였을까? 여러 강 중 물류가 가장 활발했다. 남해 바다를 통한 해운과의 소통지 또한 낙동강이었다.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져온 낙동강인데, 그 중심 역할을 상주가 했다니 상주 사람들이 두고두고 자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다에 부두가 있다면 강에는 바로 나루가 있다. 나루는 강 물류의 상징이다. 지금이야 나루가 사라졌지만 그 터만은 여전히 과거의 위명을 잇고 있지 않은가.
일행은 낙동강 중심 도시 상주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나루 투어'에 나섰다. 상주시 낙동면에 가면 의성군 단밀면을 잇는 낙단교가 있다. 낙단교 아래는 바로 상주의 낙동강 중 수량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지금도 강에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일행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한때 낙동강의 으뜸이었던 낙동나루(낙동진, 의성 쪽에선 낙정나루)가 있어서다. 아쉽게도 나루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낙동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조언으로 옛 흔적을 상상할 수밖에. 현재 강 폭은 100m를 넘나들지만 강 폭 이상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강과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긴 제방이 강과 나란히 하고 있다. 낙동 사람들은 옛날 나루 한쪽에서 강 건너까지가 소위 '까마득했다'고 전했다. 일행 역시 옛날 나루를 머릿속에 넣어보니 한참 동안 나룻배에 엉덩이를 붙여야할 만큼 길어 보였다.
옛날 부산 구포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종착인 낙동나루에서 싣고온 소금과 수산물을 내리고, 쌀과 곡물을 다시 남부지방으로 실어 날랐다. 조선시대만 해도 낙동나루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우리 나라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혔다. 5일과 10일에 서는 시장은 한때 낙동강 유역에선 최대 상권이었다. 낙동장은 1996년 10월 폐쇄됐고, 주막과 객주 또한 찾는 이가 없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지금 장이 서고, 주막과 객주가 있다면 낙동강이 낳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 아니었을까.
낙동나루는 영남대로를 잇는 중요 나루였다. 5척의 대형 나룻배와 도선군(渡船軍) 등 16명의 군인과 장교가 배치됐고, 중앙에서 나루 관리자(도승·渡丞)까지 파견했다. 영남 각 지역의 세곡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낙동나루에서 집하됐고, 다시 육로로 문경새재를 통해 서울로 운송됐다. 낙동나루는 영남 물산의 총잡산지였던 것이다. 낙동나루의 건너 쪽인 단밀의 낙정리에는 철도역 격인 낙동역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역에는 말이 13필, 역 종사원이 490명, 노비가 48명이 있었다고 했다. 인근 용산리에는 남쪽에서 싣고온 소금과 해산물을 임시 보관하는 염창(鹽倉·소금창고)도 만들어졌었다. 역의 규모와 염창 등의 부대 시설을 봐도 낙동나루의 물류가 얼마나 많고, 활발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상주의 낙동강에는 크고 작은 나루가 12개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낙동·뒷디미·물댕이·토진·대바우·강창·비란·회상·회곡·운성·퇴강·하풍 등이 바로 그 이름들이다. 낙동강 본류에 상주보다 많은 나루를 가진 시·군은 없다.
뒷디미는 상주 사람들이 의성 안계장을 다닌 나루다. 토진은 중동면 신암리와 낙동면 물량리를 연결하는 나루로 예천·안동과의 통로였다. 염창이 있었던 것을 미뤄볼 때 예천과 안동 땅의 농산물과 소금과의 물물 교환이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옛날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염창을 관리하던 사람이 창고의 소금을 몰래 마을에 옮긴 뒤 소금장수에게는 홍수로 소금이 녹았다고 속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하튼 토진나루는 낙동나루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낙동면 신촌에서 중동면 강창마을을 잇는 강창(江滄) 나루는 홍수 때 강에 물이 넘치면 강의 규모가 큰 바다와 같다고 해 이름이 붙여졌다. 나루가 꽤 컸다는 뜻이다. 상주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생활필수품은 대개가 강창나루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상주의 나루마다 소금이 내려졌다. 소금이 강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중요성은 엄청났다. 물물 교환의 '단골손님'이 바로 소금이었다. 소금의 물류를 가졌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지역의 경제가 번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사벌면 매협리 역골 마을에는 '소금역'이라는 평야까지 있다. 자연의 들 이름에도 '소금'이 나오니 "낙동강의 소금이 상주 땅에 모두 모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나루의 교역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상주시가 2006년에 조사한 자료에는 1911년도의 강창과 퇴강나루의 교역물량을 이렇게 적었다. 소금(포)의 경우 강창은 1만7천315포였고, 퇴강은 4천295포였다. 남해 바다에서 올라온 명태는 강창이 1천67짝, 퇴강은 265짝이었고, 석유(상자)는 강창이 2천719상자, 퇴강은 675상자였다. 또 주류(통)는 강창이 145통, 퇴강이 36통이었고, 성냥(상자)은 강창이 275상자, 퇴강이 68상자였다.
나룻배가 상류로 올라올 땐 소금과 생선, 잡화류를 가져왔고, 교역 뒤 낙동강 하류로 내려갈 때는 농작물과 목재, 석탄 등을 실었다.
나루로 상징되는 수운은 도로와 철도가 생기고, 바다를 통한 교역량이 급증하면서 육지(육운)와 바다(해운)에 그 설 자리를 뺏겨 버렸다. 여기에 홍수 조절과 농업 및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 건설로 수운은 그 생명력을 사실상 잃어 버린 것이다. 강은 바다와 함께 나라 살림과 서민들의 삶을 도맡는 등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육지와 바다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수운이 옛 지위를 완전히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강에 사람이 모여 나룻배를 타고 오고 가는 모습쯤은 다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낙동강 경제의 축이었던 상주가 먼저 주막과 객주, 낙동강에 의지해 살아온 우리네 모습과 스토리를 재현하고, 나루를 복원하는 것도 낙동강의 위용을 되찾는 또 다른 시도가 아닐까.
때마침 상주는 낙동강 프로젝트에 도시의 운명을 내걸고 있다. 도남동 낙동강변에 낙동강 생물자원관을 건립한다. 사벌면 상풍교와 중동면 강창교를 잇는 낙동강 투어로드가 조성되고 있어 내년쯤이면 산림욕장과 쉼터, 꽃군락지, 낙동강 전망대 등이 관광객을 맞는다고 한다. 또 낙동면에는 낙동강 역사문화관이 들어선다. 2015년쯤 상주가 자랑하는 역사와 문화 자산이 상주 전역에 펼쳐지면 영남의 으뜸 고을 상주는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다.
이종규기자 상주·이홍섭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조희열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강경모 상주향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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