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위정자가 통치를 잘하여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기를 治世(치세)라 했고, 그렇지 않은 때를 亂世(난세)라고 불렀다. 치세는 군주의 목표였고 학자의 이상이었다. 시경에서는 치세를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鳶飛戾天 魚躍于淵)고 묘사하고 있다. 태평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선생도 치세를 염원하셨다. 안동의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변에는 원래 있던 언덕에 대를 쌓아서 만든 암벽이 하나 있다. 이름이 '天淵臺'(천연대)이다. 이 암벽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선생 사후 도산서원으로 확장)을 마련하면서 독서와 사색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축조하신 것이다. 이름은 시경 구절에 나오는 天과 淵에서 딴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편안한 삶과 평화로운 세상을 희구했던 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좋은 뜻을 지닌 치세를 정반대로 악용한 사례도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6월 초에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야마구치현으로 역사 탐방을 갔었는데, 탐방 코스 중에 사이고테이(菜香亭)라는 옛 요정집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집 2층 방 벽에 '우오오 도루'(魚躍)라는 글이 씌어 있는 액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시경에 나오는 글귀를 따온 것이었다.
액자 속의 글을 쓴 인물이 바로 1895년(을미년) 가을 주한 일본 공사로 있으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라는 자였다. 시해 2년 전인 1893년 말에 이 액자의 글씨를 썼다고 되어 있었다. 그 요정에는 주한일본공사를 여러 차례 지냈고 이 요정의 이름을 지었다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와 같은 제국주의자들이 제 집 드나들 듯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고 미우라 고로우는 왜 이 글귀를 쓰게 되었을까?
우리 역사학계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갑오경장이 있던 1894년에 1차 시도가 있었지만, 여의치 못해 그로부터 1년 후인 1895년에 결행되었다고 한다. 즉, 미우라가 '우오오 도루'라는 글을 쓴 지 불과 몇 달 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미우라는 거사를 앞두고 충성 서약으로 그 글귀를 상관들에게 바치고 격려와 찬사를 듣지 않았을까? 치세를 노래한 시경의 글귀가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싶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과거 일본은 무사들의 전장터였다. 싸움과 침략이 끊이지 않았고, 하극상이 다반사였다. 왜구의 노략질과 임진왜란도 이러한 무사들의 침략성의 발로였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江戶) 막부 이후로는 270년 동안이나 평화가 지탱되었다. 그 계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강항과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마련해 주었다. 하극상의 칼부림을 종식시켜야 했던 에도 막부는 조선의 선비들로부터 전달된 성리학, 특히 퇴계 선생의 敬(경)의 가르침을 배워서 무사들에게 주군을 섬기라고 가르쳤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강조했다. 이웃 조선과도 평화를 유지하였다. 12차례나 왕래했던 조선 통신사는 문화 선진국 조선이 미개국 일본을 깨우쳐 준 문화의 사절단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은 다시 침략주의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성리학을 배워 변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조선의 선비는 붓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본의 무사들은 항상 칼을 차고 있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속에 내재한 호전적 기질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구한말의 침략으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이제 몇 주 후면 광복절이 돌아온다. 과거는 얽매여서도 안되지만 잊어 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일까? 진정한 극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김병일(도산서원 선비수련원 이사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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