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신유목민 문화와 하이브리드

고유가 시대 운전자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있다. 국내 한 자동차 회사가 개발한 엘피지 하이브리드 차의 연비를 휘발유로 환산하면 38㎞나 된다고 한다. 어떤 신기술을 적용한 차이기에 연비가 이렇게 좋단 말인가? 고속으로 달릴 때는 석유로, 저속으로 달릴 때는 고속 주행 때 충전된 배터리로 가는 차라고 한다. '하이브리드'라는 말은 원래 집돼지와 멧돼지의 혼종에서 나온 말로서 '혼성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산업 분야 전문용어인 이 말은 다른 두 종류의 재료를 조합하여 기존에 없던 강한 재료를 만드는 것을 뜻하는데, 상이한 두 기술이나 시스템이 결합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이질적인 것을 융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발상법을 두고 '하이브리드적 사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2004)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아버지의 부도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자 주인공은 고시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방음도 안 되고 새우잠을 자야 할 정도로 비좁다. 거기에서 지내는 자들은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가정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빈민층이다. 복도는 기차 터널과 같고, 방은 '관'이라고 불러야 할 그런 공간이다. 여기서 2년 반 동안 살았던 '나'는 컴퓨터를 일상의 가장 중요한 필수품으로 여긴다. 컴퓨터 때문에 언제나 밀실로 스며든다. 화자는 형이 죽자 화장하여 '통조림 속에 보관된 참치처럼' 납골당에 안치한다. 납골당도 고시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고시원, 컴퓨터, 납골당은 단절된 밀실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상징한다. 이 소설은 소통과 광장 부재의 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늘의 문화 현상을 '유목민'(노마드)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는 입장이 널리 퍼져 있다. 현대인의 생활 전반에 유목민의 문화적인 속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정주형 사고에서 탈피하여 유목민의 시각에서 인류 문화를 재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직종을 자주 바꾸거나 시간대별로 나누어 여러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개념도 있다. 고도의 디지털 기술 장비를 활용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행은 이제 현대인에게 여가활동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되었다. 집을 벗어나 밖으로 떠나고 싶은 것은 정주인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이 같은 문화 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타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인문학 강의가 교도소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어느 신문 보도에 따르면, 문학과 철학 강의를 들은 한 수감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막 살았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수감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정 교육에서 인문학이 필요함을 잘 말해 준다. 출소 후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함께 살아가려면 자신과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이는 기술 교육만으로 불가능하다. 그 대안으로 인문학이 떠오르고 있다. 노숙자의 재활에 인문학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문학은 총체적인 인간성과 인간 삶을 탐구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 가치 문제가 그 핵심이다. 인문학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사회에서 남과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을 길러준다.

비정규직법과 미디어법을 놓고 정치판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정말로 타협점이 없을까? 철벽을 사이에 두고 전혀 융합하지 않는 두 힘의 실체와 속성은 무엇일까? 이질적인 것끼리 융복합을 이뤄내는 데에는 에너지와 비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적 융합을 달성한 결과는 그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갑을고시원'의 주인공이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밀실의 벽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 분명하다. 한편 신유목민 문화가 점점 확산되면서 세상은 타자와 협력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융합을 이뤄내는 능력을 중시할 것이다. 밀실의 벽이 견고해질수록 타자와의 소통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유목민과 밀실 문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 양자를 잇는 통로는 하이브리드와 인문학 정신의 실천이 아닌가 싶다.

신재기(경일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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