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히로히토와 맥아더

히로히토'맥아더 '은밀한 거래' 해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 장면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 장면

"나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따른 모든 것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또 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군사 지도자, 군인 및 정치가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직접 책임을 집니다. 자신(나=히로히토)의 운명에 대해서는 귀하(맥아더)의 판단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이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1945년 9월 27일, 패전한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이 맥아더 미군 사령관과 행한 1차 회담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감동적인 일왕의 이 말은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히로히토는 여러 경로(미국 기자, 외무관리, 측근, 맥아더 등)를 통해 도조 히데키로 대표되는 군부에 책임을 전가했다. 히로히토는 전범 재판을 받고 싶지 않았다. 히로히토와 그의 측근들은 모든 전쟁 책임을 도조 히데키 일파에 떠넘김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도조의 독단에 의한 것이다. 폐하는 몰랐다." "도조가 끊임없이 천황에게 전쟁에 돌입할 것을 요구했다." "천황은 진주만 공격 바로 직전에 선전조서에 서명했다."

일왕의 측근들은 왕에게 책임이 없다는 일련의 발언들을 쏟아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 프랭크 클럭혼은 직접 일왕을 만났다. 일본의 요구로, 일왕의 뜻을, 일왕은 큰 잘못이 없음을 미국인에게 직접 전하기 위해 이루어진 기자회견이었다. 5분에 걸친 인터뷰 후 클럭혼은 기사를 본국에 타전했다.

9월 25일자 뉴욕 타임스 1면엔 '히로히토, 인터뷰에서 진주만 기습 책임을 도조에게 전가하다'라는 헤드 라인이 붙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기사는 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29일 일본 신문에 클럭혼의 기사가 게재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런 기사는 일본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이 기사를 게재한 신문은 모두 압수됐다. 일본의 내각 정보국 대변인은 이 기사대로라면 "천황 자신이 도조 히데키 대장을 비난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대변인은 "천황은 어떤 사람도 결코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천황은 그 같은 비난을 초월해 있다. 클럭혼의 기사대로라면 일본 국민은 천황이 도조 히데키를 비난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커다란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일왕은 한편으로 도조 히데키의 책임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쟁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식의 교묘한 이중전술을 펼쳤다. 이 모순되는 주장을 교묘하게 펼침으로써, 법적으로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고, 일본 국민의 도덕적 비난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도쿄전범재판에서는 법적 논리를, 일본 국민들을 향해서는 도덕적 변명을 교묘하게 행했다.

히로히토는 살고 싶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럼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맥아더는 무슨 이유로 히로히토를 책임 있는 국가 지도자, 민주화를 열망하는 지도자로 보이게 한 것일까.

맥아더는 히로히토의 권위를 이용해 원활한 '패전 처리'와 '점령 정책'을 펼칠 수 있기를 원했다.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도록 본국(미국)에 강하게 설득했다.

1946년 새해 첫날 히로히토는 유명한 '인간 선언'을 했다. 맥아더는 기다렸다는 듯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시나리오를 완성해두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환영 성명에서 '(히로히토는) 일본 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 역할을 다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히토는 전쟁의 상징에서 민주화의 상징으로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맥아더의 권력과 히로히토의 권위가 양대 축을 이루어 각자의 이익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에 미국의 장기 주둔을 요청한 쪽도 히로히토였다. 종전 후 첫 번째 위기, 즉 도쿄재판(전범재판)에서 벗어난 히로히토가 직면한 두 번째 위기는 공산주의에 의한 천황제 타도였다. 1947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히로히토와 그 측근들은 맥아더와 4차 회담을 통해 '미군이 일본의 안전보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아가 이른바 '오키나와 메시지'를 통해 미군이 장기간 오키나와를 점령해 줄 것을 요구했다. 소련 공산주의 영향력의 확대와 천황제 타도를 내건 일본 공산당의 활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히로히토는 또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패할 경우 일본에서 혁명, 전쟁 재판, 천황제 타도로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천황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미군 주둔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는 미군 주둔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화조약 체결과 미일안보조약 체결을 강행했다. 미' 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절망에 찬 목소리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알리던 히로히토, 파이프 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이미지는 막연하다. 2차 대전이 종결된 후, 이 두 사람은 기막힌'거래'를 한 셈이다.

이 책은 미국의 맥아더와 일본 히로히토의 '거래'를 실증적으로 밝힌 책이다. 거래를 통해 미국은 히로히토의 권위를 이용해 점령을 원활히 하고, 일본에 거대한 미군 기지를 둠으로써 공산 세력의 남하를 막는 반공 기지를 확보했다. 히로히토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천황제를 지킬 수 있었다.

지금까지 히로히토와 관련한 책이나 논문이 주로 그의 '전쟁 책임'에 관한 것이라면, 이 책은 '전후 책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 독자들에게도 익숙지 않은 문제이고,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더욱 생소한 이야기다.

한편 히로히토는 1978년 이후 죽을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가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왕의 지시로 만들어진 장소로 '천황을 위해 죽은 영령'을 기리는 국가 사당이다. 천황이라는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시설인 것이다. 그럼에도 히로히토가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것은 야스쿠니 측이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을 합사했기 때문이다. A급 전범을 처형하고 그 대신 자신을 살려준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까지 표한 히로히토로서는 참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296쪽, 1만6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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