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권]인문학적 상상력의 확장 현시점 작지만 절박한 위안

나는 자연 과학 논문을 전혀 읽을 수 없다. 예전에 광우병의 위험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 전문가가 쓴 논문을 구해 읽어보았는데, 글쎄 단 한 줄도 독해해 낼 수가 없었다. 의학 논문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농아 수준의 번역이라는 놀림을 받고 개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문외한'이란 단어가 문자 그대로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약속의 언어'를 모르니, 나 같은 사람은 결국 과학이라는 성채 바깥에 사는 불가촉 천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번씩 나 같은 문맹들에게 굳게 닫힌 '과학성'의 적교(吊橋)를 내려주는 은혜로운 저자들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나 브라이언 그린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편안한 관광버스에 우리를 태워,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학 성채 안의 경이로운 유적지들을 관람시킨다. 저자들은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며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 책은 마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상 과학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라 과학서이다……생물학 자체가 하나의 추리 소설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생물학은 마땅히 추리 소설처럼 흥미로워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홍영남 옮김/을유문화사/472p/15000원

나는 이 책에서……독자들의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종종 사용하긴 했지만, 과학적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고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전문 용어와 수식어 사용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박병철 옮김/승산/592p/20000원

나는 이들의 노력으로 '인간은 유전자와 DNA가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로 만들어진 생체 로봇'이라는 충격적인 유전공학적 발상을 음미한다. 또한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물리학의 대안,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구경한다. 40억 년 전의 원시 수프에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원자보다 더 작은 뉴트리노가 되어서 수조 마일 두께의 납덩이도 통과해 본다.

열심히 과학 투어를 따라다녀 봤자 불가촉 천민이 갑자기 과학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첨성대를 구경하고 남산을 오른다고 신라사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 같은 인문돌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이 과학 이론에 관한 '은유'와 '비유'가 이끌어낼 인문학적 상상력의 확장, 그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작지만 절박한 위안이기도 하다. 통섭이 취소되고, 돌발영상이 금지되고, 겸임교수가 잘리는 이 보릿고개에 결국 인문학은 상상할 자유, 그것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지 않나.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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