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시간이 서서히 다가왔다.
출발 전부터 두 사람 모두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안중근 의사는 국권을 되찾기 위해 '흉적' 이토를 처단하려 했고 이토는 러시아와 교섭을 벌여 일본의 만주 경영을 도우려 했다.
◆이토, 죽음으로의 여행
추밀원(일왕 자문기관) 의장 이토는 하얼빈으로 출발하기 전날인 10월 13일 오이소 자택에서 단도 2자루와 칼이 들어있는 지팡이를 준비했다. 러시아 재무대신 겸 동양사무주관인 코코프체프와 공식 회담을 벌이는데 칼부터 챙긴 것은 이상하다.
"1905년 대한제국 통감직을 수락했을 때 이토는 원훈이자 국가의 공신이었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임무를 마치고 물러났지만 민족적 원한을 산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앞으로의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은 이토도 절감했을 것이다." (미요시 도오루의 '이토 히로부미')
미요시는 전기작가답게 "피습을 예감했기 때문"이라고 썼지만 젊은 시절부터 갖고 있던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메이지 유신 전에는 정적의 습격을 받기도 했는데 골목 모퉁이를 돌기 전 미리 칼을 뽑아 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토는 칼솜씨가 변변치 못했지만 항상 칼을 들고 다니며 자객의 습격에 대비했다.
이토는 출발 직전에 외국 유학을 떠나는 아들 분키치를 불렀다. 분키치는 집 밖에서 낳아온 아들이다. "이번 만주여행은 특별한 사명은 없으나 장차 일본은 중국, 러시아 등과 어려운 관계에 놓일 것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마음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겉으로는 느긋한 여행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부담감이 컸다. 러·일전쟁의 대표적 리더들이 회담한다는 사실에 영국, 프랑스 등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동청(東淸)철도의 기관지 하얼빈 웨스트닉은 10월 24일자에 이토의 여행 목적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토의 만주여행은 개인적 유람이나 천황이 준 포상 휴가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제의에 의한 것이다. 이토는 일본으로 귀국하면 남만주 대수(大守)에 임명될 가능성이 있다. 남만주 철도 정리 및 철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정부로부터 위촉받고 있다."
일본 측은 이를 '추측 보도'라고 했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한 기사다.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의 편저자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는 "이토의 여행 목적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합병 추진을 승인하게 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밀약을 통해 중국 만주의 분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 늙은 도적은 내손으로 처단…
안중근 의사는 1909년 9월 러시아 엔치야(煙秋)에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던 터라 자책감에 울적했다. 단지(斷指)동맹을 맺고 동지들을 규합했지만 당장 거병할 처지도 못 되었다. 갑자기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겠다고 하자 동지들이 왜 그러느냐고 말렸다.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마음에 번민이 생겨 도저히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요.' 그들은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나 역시 무의식중에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이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원 15명과 함께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열혈청년들은 모이면 지금이야말로 이토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당시 의병들의 첫번째 암살대상은 이토였다.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게 하고 국권을 빼앗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동지들이 그를 살해할 방법 등에 대해 때때로 의논하고 있었으므로 (중략) 타인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우려하여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재판기록)
안중근은 거사를 위해 동지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의 열하루'를 쓴 조선족 사학자 서명훈씨는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한 것은 하얼빈의 역사유산이요 자랑거리"라며 "조선과 중국 인민이 일본제국주의에 본격 투쟁하는 계기는 하얼빈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의거 전날 안중근은 벨기에제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을 꺼내 깨끗이 닦고 소원 성취를 빌었다. 감개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장부가'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어여 어느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에(의) 뜻이 뜨겁다/ 분주히 한번 가미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토)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시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도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도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장성혁 동영상기자 jsh052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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