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던 한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다 아무런 이유없이 눈이 먼다. 눈이 먼 남자를 집으로 데려다 줬던 남자도 얼마 뒤 눈이 먼다. 눈먼 남자의 차를 훔쳤던 도둑도, 그 도둑을 잡았던 경찰관도 잇따라 눈이 먼다. 눈이 머는 현상은 전염병처럼 급속히 도시 전체로 퍼진다. 도시의 차들은 멈춘다. 전력이 끊기고, 쓰레기는 도시를 뒤덮는다. 눈먼 사람들은 수용소에 격리되고, 전염을 우려한 군인들은 이들에게 무찰별적으로 총격을 가한다. 수용소는 총격을 가한 일부 군인들을 포함해 눈먼 사람들이 계속 몰려 포화상태에 이른다. 눈먼 사람들은 이제 수용소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 먹을 것을 찾아, 생존을 위해 떼지어 돌아다닌다. 도시 전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를 통해 인간의 양면과 폭력성, 모순을 들춰내고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작가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1949)에서 극도로 통제된 사회를 그렸다. 거리와 관공서, 가정집 거실과 화장실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텔레스크린은 쌍방향으로 소리와 영상이 전달되는 장치다. 당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의 말과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 감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정을 나누거나, 일기를 쓰거나, 과거를 회상하며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것조차 당에서 금지하고 있다. 부부 간의 성생활조차 '당에 충성할 자녀를 생산하는 목적'에 한해서만 허용될 뿐이다.
요즘 신종플루가 유행이다. 과거엔 조류독감도, 돼지콜레라도, 사스(SARS)도 유행했다. 유독 국내에서 더 유행(?)했다. 언론이 연일 보도하고, 정책당국은 요란스런 대책을 쏟아냈다. 그 유행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파장은 컸다. 국내외 여행객들이 움츠렸고, 학생들 수학여행도 자제됐다. 그 짧은 유행 동안 축산농가와 관련 음식점은 항상 큰 타격을 입었다. 농민들이 전업하거나 문을 닫는 식당이 속출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전세버스업체를 비롯한 여행업계가 울상이다. 수학여행을 비롯해 학생들의 단체활동이 중단되고 있다. 가을 문화행사와 축제가 사라지고 있다. 대형 공연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마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전조를 보는듯하다.
그렇다면 국민들을 불안감으로 몰아가는 것이 신종플루 탓일까. 신종플루는 인류에게 유행하는 수많은 전염병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전염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염성과 강도가 크지도 않다.
행정안전부는 이달 초 신종플루를 이유로 '일정규모 이상의 행사를 취소'하고 이 방침을 어길 경우 담당자들을 문책하겠다고 각 지방자치단체에 지침을 내렸다. 물론 이 지침은 열흘 만에 다소 변경됐지만, 그 사이 '문책'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상당수 행사와 축제가 취소됐다. 행안부의 지침이 적절하다면, 전염 가능성이 더 높은 지하철, 여객기, 선박, 버스 운행을 중단해야 한다. 또 백화점, 학교, 멀티플렉스, 공연장 문을 모두 닫아야 한다.
닫힌 사회와 통제된 사회에선 공동체 문화가 꽃피울 수 없다. 탁상행정과 면피행정을 일삼는 정책당국과 스포츠 중계하듯 신종플루 현상만을 연일 생중계하는 일부 언론이 신종플루 자체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부정확하고 불필요한 정보, 떠들썩한 대응'이 국민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때다. 김병구 사회정책팀 차장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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