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낯설게 하기

친한 동료 교수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며칠째라고 했다. 기침을 하거나 재채기를 하면 더욱 심해진다고 했다. 새벽에 머리가 아파 잠을 깬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뇌압이 높은 환자들은 밤에 두통이 심해진다. 잠을 자면 차라리 두통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러면 감기 정도가 아니겠느냐고 일축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라도 걸린 것이 아니냐고 농담까지 했다.

얼마 있다가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양쪽 어깨 사이가 아프고 당긴다고 했다. 아픈 것이 양팔쪽으로 뻗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경추 디스크(추간판 탈출증)는 아닌 것 같으니 목욕탕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근육을 풀어주어라고 간단히 말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머리 MRI 촬영을 할 예정이니 몇시에 MRI방으로 와서 사진을 좀 봐 달라고 했다. MRI를 촬영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부인의 엄포에 굴복해서 찍는다고 덧붙였다. '에이, 감기 같은데 뭘 MRI까지 해보려고? 별 이상이야 있겠나?'하는 생각과 함께 사진을 봐주기로 약속했다.

촬영해 놓은 MRI 사진을 검토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자발성 두개강내 저압증이 의심되었다. 척추천자로 확진했고, 척추강내 방사선동위원소 주입 조영술로 뇌척수액 유출 부위를 찾아내 자가 혈액 척추강내 주입법으로 완치시켰다.

의사 가족은 '무의촌 주민'이라는 말이 있다. 가족이 아프다고 하면 의사는 무조건 괜찮다고 말한다. 또 'V·I·P 증후군'이라는 말도 있다. 자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든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가진 사람을 치료할 때는 의사가 부담감을 갖는다. 그래서 치료 방침을 과감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수술이라든지 위험성이 따르는 진단 방법을 지연시키다가 환자를 치료하는데 고생하는 경우가 있다.

앞에 언급한 교수도 수많은 의사 동료들이 주위에 있었으나 결국 MRI는 의사와 관계없는 부인 때문에 촬영을 했다. 내가 의사가 된 지 벌써 36년이다. 그동안 그렇게 정에 끌리지 말고 냉정하게 환자를 보자고 다짐해 왔지만 아직도 이렇게 실수를 저지른다. 낯설게 하기, 어찌 글쓰기에만 필요한가? 환자를 보는 데도 필요한 게 아닌가? 또한 매일 보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눈길이 아닐까? 낯설게 보면 그들 모두가 아픈 곳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가을이다. 곧 찬바람이 불 것이다. 아픈 곳이 직접 찬바람에 스치지 않도록 우리 서로 보듬어 안아 보자.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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