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뒤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어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를 전하고 인간의 선험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성급히 물든 단풍과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 열매는 바야흐로 가을의 아름다움과 서러움을 전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다채로운 색감으로 변신하는 가을 산을 오를 때마다 기대감과 함께 신비로움을 주체할 수 없다. 이 산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이맘때면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심심찮게 우리들의 청각을 집중시킨다. 그 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귀를 곤두세우던 청설모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담황색의 털을 휘날리며 도토리를 낚아채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휴일이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를 분 단위로 나누어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삐 움직이는 일상이 대부분인데 그날은 감사하게도 동네 뒷산을 즐길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남편은 평소 가던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올레길(제주도만 올레길이 있냐? 범어동 뒷산도 있다!)을 개척해보자며 치기를 발동하였다. 몇 년을 내 집처럼 오르내리던 산이건만 이제껏 알지 못했던 비밀스런 길들이 여기저기 미로처럼 사람들의 발자취로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가족 단위의 등산객들이 많다. 여기저기에서 밝은 얼굴과 환한 미소로 산의 정취를 즐기며 가족끼리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필수품처럼 들려 있다. 갑자기 '뚝' 하고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달리기 경쟁하듯이 전력질주하여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먼저 목표물에 도달한 한 사람이 검은 봉지에 획득물을 집어넣고는 득의만만하게 뒤따라오는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 목표물을 뺏긴 뒷사람은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다. 손에 열매 담긴 비닐봉지를 든 또 다른 할머니는 코흘리개 손자에게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교훈한다. 열매 하나를 손바닥에 올리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표정으로는 명심보감 정도의 심도 있는 교양서적 강의쯤 될 듯하다. 저쪽에서는 하이힐을 신은 멋쟁이 처녀가 낙엽사이를 발로 뒤지고 있었다. 잃어버린 보석반지를 찾을 법한 상황 설정인데 그녀의 손에도 어김없이 열매 담긴 비닐봉지가 들fu져 있었다. 잠시 후 심마니의 "심봤다" 표정이 연출되더니 보석 같은 열매가 봉지 속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다들 도토리 발굴 작전 중이였다.
이 산에 살고 있는 청설모가 생각나 명치끝이 서늘하다. 기억력이 둔해 가을에 도토리나 열매를 숨겨두고도 겨울이 되면 찾지 못하는 아둔한 녀석이 이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가을의 도토리조차도 차지할 수 없다. 도토리묵 말고도 먹을 것을 지천으로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주식을 재미로 가져가 버린 탓이다.
우리도 유희가 생겼다. 남편과 나도 도토리 발굴 작전에 나섰다. 도토리를 주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던지기로 한 것이다. 떨어지는 소리에 서로 앞다투어 달려간다. 주운 도토리를 서로 멀리 던지기 놀이하며 반나절을 희희낙락했다.
우리가 이 동네 살기 전, 우리가 이 산을 오르기 전부터 이 산을 지키던 청설모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도토리 나도 좀 주이소!"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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