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高3 교실 복학생 … 나, 이제 겨우 쉰살

그립던 모교 31년만에 컴백, 영남고 3학년 5반 이병철씨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병철(50)씨가 31년 만에 고교에 복학, 아들보다 어린 고교 동급생들과 생활하고 있다.
정민표 교감, 서창수 교감, 박성규 교장, 신진옥 전 담임 선생님과 이병철 씨.(왼쪽부터)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병철(50)씨가 31년 만에 고교에 복학, 아들보다 어린 고교 동급생들과 생활하고 있다.
정민표 교감, 서창수 교감, 박성규 교장, 신진옥 전 담임 선생님과 이병철 씨.(왼쪽부터)

한때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두사부일체'. 폭력조직 두목이 새까만 후배들과 함께 고교생활을 하며 겪는 에피소드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배꼽을 잡게 만든 영화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났다. 50대 회사 대표가 31년 만에 고교(?)에 나타난 것. 타임머신을 타고 온 '외계인' 대접을 받지만 꿋꿋하게 만학도의 길을 가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50대 사업가 이병철(50·상주시 신봉동 세영첼시빌)씨. 그의 직함은 화려하다. 상주 현대자동차 수정정비 대표, ㈜수정관광·화물 대표, 경상북도 교통연수원 이사장, 경북전세버스운송조합이사장….

이 사장은 요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매일 오전 5시 반이면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한다. 한시간 반을 달려 7시 40분이면 대구 달서구 영남고교에 도착한다. 3학년 5반.

#31년의 한(恨), 돌아가자 초심으로…

고교 3년 시절을 다 보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이 사장의 가슴 한쪽을 항상 억눌렀다.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성취한 사회적 지위에다 모두들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한 삶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자책감이 늘 따라다녔다. 젊은 시절 한번 부린 호기가 평생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세달을 남겨두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2녀 1남의 자녀들에게도 결코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31년 전으로 되돌리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유일한 정신적인 버팀목은 아내였다. 아내는 복학을 망설이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 이 사장은 일주일간 꼬박 고민했다. 밤잠을 설쳤다. 50년간 살아온 동안 이토록 고뇌를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침내 결심했다. 31년 전의 고교 3학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

2009년 8월 26일. 모교의 정문을 들어서던 날. 용기를 가지고 집을 나서긴 했지만 막상 학교 정문을 들어서려니 쑥스러웠다.

"사나이의 진정한 용기는 이럴 때 필요한 것"이라고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도 교무실 문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다. 한참이 걸렸다. "선생님들이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당시 3학년 9반 담임이었던 신진옥(61) 선생님이 아직도 학교에 계셨다. 신 선생님은 31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31년 동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당시 병철이가 방황할 때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졸업장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을…, 지금까지 가슴앓이를 해왔었는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다"고 했다.

#아저씨 선배님!

이 사장은 복학한 지 50여일째다. 그는 영남고 역사 이래 두개의 졸업앨범에 수록되는 주인공이 된다. 31년 전 고3 시절엔 28회, 올해는 59회다. 31년 차이의 동급생들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며칠 전 졸업앨범 사진도 찍었다. 쉬는 시간이면 반 아이들과 팔씨름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지낸다. 종종 아이스크림을 반 전체에 돌리는 선심도 쓴다. 그래도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할 때는 꼭 존대어를 쓴다.

젊은이(?)들과 부대끼며 점차 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학교생활에 더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의 책가방 속에는 오창주(47) 담임선생님이 선물(?)한 한문교과서와 책 '배려' '긍정의 힘' '5분 설득력' 등이 들어있다.

영남고 박성규(60) 교장은 "처음에 복학을 결정할 때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우려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우였다. "오히려 요즘은 학교생활을 즐기고 착실하게 생활해 도리어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진학담당 정민표(56) 교감도 영남고 20회 출신. 8년 선배다. 요즘은 학교생활에 대해 상의하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됐다. 현 담임 오창주 선생은 "솔직히 나이가 더 많아 좀 부담이 됐었다. 걱정과는 달리 너무 성실하고 바른생활을 해서 반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생살이

1978년 11월, 3학년 말에 갑자기 혼란이 시작됐다. 6남매의 장남이던 이 사장은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황했다. "대학진학보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학교를 뛰쳐나왔다. 20세.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학습지사업을 시작했다. 3년 동안 50명의 교사들을 고용할 정도로 잘나갔다. 사업에 대한 추진력은 남달랐지만 운영경험과 경영지식 부족으로 결국 첫 사업에 실패했다. 우연히 관광업에 발을 디뎠다. 1989년 전세버스를 한대 빌려 운전기사로 나섰다. 그동안 숱한 고생도 했다.

20년이 지난 현재 그는 관광회사와 정비회사의 대표에다 경북도 교통관련단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 사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 못다 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이 사장은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요즘 부쩍 전문적인 경영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대학과 대학원에도 진학할 계획이다.

"중간에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대학원까지 해낼 겁니다."

상주·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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