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방석 내지마라
한 호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짚방석 낼 것 없다. 수북이 쌓인 낙엽에 앉아도 좋지 않겠느냐/ 관솔불도 켜지 마라 어제 진 달이 떠올라서 밝혀주지 않느냐/ 아이야, 갓 익은 막걸리에 산나물 안주면 족하니 없다 소리나 말고 내어 오너라"로 풀린다.
조선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峰) 한호(1543~1605)의 작품이다. 한호라고 하면 낯선 듯하지만 한석봉하면 아주 친근한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 해서 · 행서 · 초서 등 각 체에 모두 뛰어났고, 당시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획득한 석봉 특유의 강건한 서풍을 창시하였다. 최초의 직업 서예가였으며 추사 김정희와 함께 근세조선 서예의 쌍벽을 이루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9년 천거로 사어(司御)가 되었으며 가평군수, 흡곡현령, 존숭도감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았다.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서예가가 시조 작품을 남겼다. 낙엽 위에 앉아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것은 가난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킨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극치다. 작품에 자연을 즐김이 있고 사람이 있고 사람 사이의 정이 있다. 그냥 흐뭇하다. 이쯤 되야 자연 속에 인간이, 인간 속에 자연이 있어,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것이리라.
명필의 한호가 이 작품을 썼을 경지라면 좋은 시조를 많이 남겼을 법도 한데 한 편 밖에 없다니, 그야말로 '오호! 통재'다. 임금의 사랑을 받는 명필, 그렇다면 호사에 빠질 만도 한데 선비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았으니 그의 인품 또한 얼마나 높았겠는가. 서예로 일가를 이루면서 시를 짓기도 한 한석봉,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만능 엔터테이너다.
자연에서 멀어지고, 여유를 잃어버린 팍팍한 현대인의 삶, 낙엽 지는 가을에는 한 번 뒤돌아 볼 일이다. 시라도 한 편 찾아 읽고, 가까운 전시장이나 공연장에도 발길 한 번 돌려 보는 것이 문화의 시대를 사는 문화인의 삶이 될 것이다. 오늘은 2009년 '문화의 날'이다.
문무학 시조시인·경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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