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한글과 통일벼

1970년 통일벼 출현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버금가는 업적

"1970년 '통일벼 출현'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이 땅의 굶주림은 수천 년 동안 속수무책으로 이어져 왔다. … 통일벼의 육성 보급은 이 문제들을 일격에 날려버렸다. 그러나 이런 통일벼의 영광은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잊혔다. … 지난 시절에는 농업의 화타나 편작 같은 이들이 나타나서 통일벼를 만들어 '괴타리'(허리띠를 일컫는 충청도 사투리)를 풀고 쌀밥을 배불리 먹도록 해주었다. 그때처럼 지금 때맞춰 그런 사람이나 해결책이 나타날 수는 없을까?"(라이스 워, 이완주 지음)

우리나라에 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만5천 년 전. 지난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59톨의 볍씨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 역사를 갖게 됐다. 종전은 중국 화북지방에서 발견된 볍씨가 1만500년으로 최고(最古)였다.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쌀 체면이 말이 아니다. 1970년 개발된 통일벼 덕분에 첫 식량 자급자족이 이뤄졌다. 수천 년 이어져 온 보릿고개도 넘기게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쌀은 고난의 길은 걸었다. 세계무역 자유화란 파고(波高)로 외국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만 했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이듬해부터 시작된 수입쌀은 해마다 늘었다. 수입쌀의 1차 공습이다.

정부는 우리쌀 피해의 최소화를 위해 처음에는 수입쌀을 떡이나 막걸리 등 가공용으로만 사용토록 했다. 하지만 2006년부터는 우리 밥상에도 미국산 칼로스 쌀을 비롯한 수입쌀이 오르도록 허용됐다. 수입쌀의 2차 공습이 시작되면서 우리쌀 밥상이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외환(外患)에다 국민들의 쌀 외면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때 100㎏(1995년 106.5㎏) 넘던 주식인 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이 지난해 75.8㎏에 그치는 등 해마다 줄고 있다. 내환(內患)까지 겹치고 있다. 쌀은 남아돌지만 우리나라 식량자급도(사료용 포함)는 80~90%(1960, 1970년대)에서 26.2%(2008년)로 하락했다. 식량 안보를 남의 손에 맡겨 놓은 꼴이다.

애그플레이션(Agflation=Agriculture+Inflation'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일반 물가가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 전 세계를 뒤덮은 것이 불과 2, 3년 전이다. 농민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쌀 시위를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정인열 중부지역본부장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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