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은 촌스럽다. 호박잎도 그렇고 호박꽃도 그렇다. 세련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호박은 무던하고 수더분하다. 마음씨 좋은 시골 아주머니 같다. 보기에는 촌스러워도 깊은 맛이 있다. 추수가 끝나가는 밭둑에 얹혀 있는 누런 호박을 보면 웅숭깊은 사람을 만난 듯 마음이 넉넉하고 편안해진다.
호박에는 농약을 치거나 비료를 뿌리지 않는다. 요즘 유행어로 웰빙 식품이다. 다만 씨를 뿌릴 때 구덩이를 깊게 파고 재래식 뒷간에서 퍼온 인분을 충분하게 넣은 후 흙으로 덮어주면 그 다음부터는 호박이 스스로 알아서 한다.
##무맛이 맛인 향수 식품 '호박잎쌈'
호박잎쌈은 무맛이 맛인 향수 식품이다. 손바닥 크기보다 더 큰 호박잎에 밥 한 술 놓고 끓인 된장을 얹으면 손가락 사이로 국물이 줄줄 새나가는 이 맛과 멋. 호박잎쌈을 먹을 때마다 농촌을 고향으로 정해준 어떤 신령한 힘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맛을 화려한 맛으로 착각하고 있는 내 혀에게도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평생을 과부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한시도 흙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자식의 직장을 따라 도시로 떠나온 후에도 집 주변의 공터를 놀려두지 않았다. 상추와 실파는 기본이고 웬만하면 호박을 심어 결실의 은혜를 하늘에 감사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밀가루 수제비를 자주 끓였다. "수제비에 넣는 푸성귀는 호박잎만한 게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사실 그랬다. 밀가루 수제비에는 감자 몇 알 썰어 넣고 호박잎을 비벼 넣어야 제대로 된 맛이 느껴진다. 호박잎 대신에 부추나 애기배추를 넣기도 하지만 맛은 호박잎을 따라오지 못한다.
호박은 돌보는 손길 없이 자랐어도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여린 잎은 쌈으로, 애호박은 부침개로, 호박꽃은 두루뭉술하게 생긴 아녀자들을 지칭할 때 "호박꽃만 모였네"라는 인용구로 아주 값지게 쓰인다. 그뿐 아니다. 제대로 익지 못한 푸른 호박은 호박오가리로, 잘 익은 누런 호박은 호박죽이나 호박 중탕용으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모든 잎들이 여름의 열정이 식어버려 초록이 지쳐 단풍으로 떨어질 때도 호박잎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버틴다. 무성한 잎들이 물기가 날아가 버리면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으로 변하지만 떨어지지 않고 버틴다. 지구 중력의 힘이 마른 호박잎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농부는 그 안쓰러움을 차마 보질 못해 낫을 휘둘러 미련을 미련으로 남지 않게 안락사란 조치를 취한다. 농부의 아내는 "오메, 가을이 깊었네"라고 한마디하곤 뻗어가다 멎어버린 호박순과 꽃에 붙어 있는 새끼호박을 추수하여 곱게 갈무리 한다. 고향에선 이렇게 끓인 국을 '호박 순애기국'이라 불렀다. 국을 끓일 땐 호박잎의 푸른 기운이 빠지도록 치대가며 빨았는데 들깨 즙을 걸쭉하게 푼 순애기국은 정말 맛있었다.
##줄기'잎 겨우내 묻었다가 밑거름으로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무 쓸모없을 것 같은 줄기와 잎들도 그냥 쓰레기는 아니다. 겨우내 두엄더미 속에 묻어두었다가 봄철에 논밭으로 실어내면 새싹을 틔우는 진짜 밑거름이 된다. 이것이 호박이 지니고 있는 숨은 미덕이다. 호박꽃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 한 편이 생각난다. 호박꽃이 이런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낼 줄은 정말 몰랐다. 유하 시인의 '사랑의 감옥'이란 시다.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나도 차라리 한 마리 꿀벌이 되어 호박꽃처럼 생긴 치마 속 사랑의 감옥에 갇혀 밤새도록 잉잉거려봤으면.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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