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기의 대구 고교 교육] ② 좋은 학교가 우수 학생을 부른다

"학교 중심은 학생…'박사 교사'도 밤샘 수업준비 당연"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해묵은 논란처럼 교육계에도 곧잘 시빗거리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입학생이 우수해서 좋은 학교냐, 좋은 학교라서 우수 학생이 오느냐'다. 얼핏 보면 그말이 그말 같고, 둘 다 옳은 말 같지만 이름난 특목고와 자사고, 자율학교 교사들은 한결같이 "좋은 학교가 먼저다"라고 했다.

일반계고인 자율학교면서 수능 성적에서 전국 5위권 이내를 벗어나지 않는 공주한일고 최용희 입학상담실장은 "우수 학생들을 뽑은 만큼 잘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학교의 수준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의 높은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과연 몇 명의 학생이 붙어 있겠느냐"며 "학생들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스스로 더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때 서울에 이어 전국 두 번째를 지키던 대구 고교들이 서울과 경기, 부산과 광주의 우수 학교들은 물론 경북의 농산어촌 우수고에까지 상위권 중3생들의 선호에서 밀려난 것은 이런 마인드 차이에서 비롯됐다. 한 퇴직 교장은 "학생들을 어떻게든 잘 가르쳐서 좋은 성과를 내야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입학생들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며 "지금 수성구 고교들은 화려했던 과거 대구 교육의 마지막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생이 먼저입니다

딸을 자립형 사립고에 진학시키려다 지난달 우연히 안동 풍산고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학교를 방문한 학부모 김모씨는 돌아오는 길에 딸과 의논해 풍산고 원서를 썼다.

"어떤 학교인지 잠깐 보고 오려 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한 시간 넘게 학교 프로그램과 지원방법을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도서관과 기숙사,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손수 보여주시는데 이런 학교라면 걱정 없이 딸을 맡겨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풍산고 윤영동 교장은 "입학하든 않든 우리 학교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라며 "학생 한명 한명이 너무나 소중한데 무슨 일을 마다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학교 운영을 학생 중심으로 하다 보니 쉬는 시간에 화장실 앞에 질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학생들이 교사를 편히 대한다"고 했다.

공주사대부고 강병갑 교감은 기자와 인터뷰 중 교무실 문쪽을 보더니 교무부장 교사를 불러 인터뷰를 맡기고는 자리를 떴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다 보니 학생, 학부모와 마주앉아 있었다. 강 교감은 "입학상담을 하러 온 것 같아 부득이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며 "학생 상담은 교무실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대구과학고 학생들은 스스로 연구과제를 만들어 실험하는 일이 많다. 실험실은 안전을 위해 언제나 교사가 함께하는 게 원칙. 수업이 끝난 후 밤늦게까지 실험실을 떠나지 않는 학생들이 많지만 어느 교사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신탁범 교장은 "자정까지 교사가 실험실을 지킬 때도 많지만 학생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데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교사가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고교들마다 보이는 공통점은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공주한일고 최용희 실장은 "미국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저술도 많이 한 교사도 부임 초기에는 학생들의 눈빛이 무섭다며 수업을 힘들어했다"면서 "교사의 권위는 박사 학위가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최고의 수업을 통해 지켜진다"고 했다. 수업 준비가 부족할 경우 학생들이 금세 알고 자습이나 학생 주도 수업을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

대구과학고 신탁범 교장은 얼마 전 부임한 대구과학고 출신 교사의 사례를 들었다. "학교 특성상 부임한 지 2년 동안은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수업을 원활히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고 출신 교사조차 수업 준비가 생각보다 힘들다면서 고교 때 이만큼 공부했으면 국제올림피아드에서 수상하고도 남았을 거라더군요."

농산어촌 우수고로 2010학년도 합격생 91명 중 18명이 대구의 상위권 중3생일 정도로 소문 난 영양여고 역시 실력 향상을 위해 교사들의 부단한 노력을 중시하고 있다. 박순복 교장은 "9년 전부터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교육방송을 듣도록 하고 매년 자기가 수업할 교재를 직접 제작하도록 했다"며 "시험이 끝난 뒤에는 교사들끼리 학생들의 교과별 성적을 분석하고 타 지역 고교와 비교해 부족한 부분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 결과 수능 성적이 2005학년도에 전국 고교 가운데 139등에서 2009학년도에는 32등으로 올랐다는 것. 박 교장은 "교사들이 교재 준비와 수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잡무를 최대한 덜어주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우리집입니다

특목고와 자사고, 자율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 모집을 하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내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기숙사 생활은 이른 기상에서부터 빡빡하게 짜인 일과와 엄격한 규율, 세끼 단체급식, 평일 외출 금지까지, 한창 피가 끓는 10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구조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학교 생활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올해 대구 오성중을 졸업하고 공주한일고에 진학한 정동익군은 "3월 입학 후 10월까지 집에 3번 갔는데 여름방학 때도 안 갔다"며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이 많기 때문에 부모님께는 죄송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주상산고 손성호 입학관리부장은 "기숙사는 선택이지만 전주에 사는 학생들까지 기숙사에서 생활할 정도로 학교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며 "주말에 자율적으로 집에 갈 수 있도록 하는데 부모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방과 후 스스로 공부하는 도서관이나 자습실 역시 자리가 빽빽하지만 학생들은 집에서 혼자 쓰는 방보다 공부가 더 잘 된다고 했다. 풍산고 한 학생은 "오후 7시부터 도서관 지정 좌석에 앉는데 80분 공부하고 20분 쉬도록 정해져 있다"며 "수업의 연속 같지만 익숙해지니 시간을 더 알차게 쓸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공주한일고에서는 한밤중에 조그만 소란이 일었다. 외부인이 학교에 들어와 복도 형광등 아래에 책상을 내놓고 공부하다 순찰을 돌던 교사에게 들킨 것. 확인 결과 그는 올해 대학에 진학한 졸업생이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잘 안 돼서 왔습니다. 여기 오면 우리 집처럼 공부가 잘 될 것 같아서요." 그는 후배들 틈에 끼여 이틀 동안 공부하다 대학으로 돌아갔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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