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노을 한 뭉치(김경인)

밀려오는데, 눈가에 닿아 도르르 풀리는데, 축축한 그 길을 따라 할머니는 돌아오시는데, 여기가 어디지? 어디지? 흑백사진 속에서 두리번거리시는데, 할머니, 돌아가세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세요,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돌아서는데, 이보오, 아즈마니, 나 좀 폥양 진지동에 데려다주우, 울 오마니 계신 데로 데려다주소고래… 할머니는 열일곱 깜장 통치마 高女졸업반이 되어 먼지로 둥둥 떠도는데, 햇살은 절룩, 절룩, 다리를 끌며 사라지고, 이보오, 저 안의 늙은이는 뉘기요? 뉘기요? 열일곱 할머니는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데, 나는 어느새 할머니가 떠준 스웨터를 입은 아기인 것도 같은데, 할머니, 할머니… 칭얼칭얼 했던 것도 같은데, 방안에 스며든 어둠은 나를 가닥가닥 풀어놓는데, 한 코, 두 코, 나를 이어 밤의 문양을 새기려는데, 이 보오, 아즈마니, 아즈마니… 할머니는 죽은 줄도 모르고 거울 뒤편을 떠돌고, 거울 속 혼자 남은 숟가락은 달그락 달그락, 밤은 한 단 두 단 길어져만 가는데

할머니와 화자와 밤의 이야기들은 모두 여성성이다. 할머니가 떠준 스웨터도 그렇고 햇살마저 여성성이다. 이때의 여성성이란 남성성과 대조하는 여성성이 아니라 온전한 여성성 그 자체여서 훼손되지 않은 여성성이랄 수 있다. 죽음 앞에서도 고향에 가야만 하는 할머니의 여성성은 먼저 "열일곱 깜장 통치마 高女졸업반"이다. 그때쯤 월남했던 할머니에게 여고 졸업반이야말로 상처없이 온전한 여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신 소녀 시절이야말로 할머니가 진정으로 되돌아가고픈 날들이다. 그래서 지금 임종을 앞두고 할머니는 그 시절의 정서 속으로 몰입한다. 스웨터도 그렇고 달그락 달그락 소리 역시 끝없이 되풀이되는 밤의 단조로운 문양이다. 그 배경이야말로 할머니의 회귀를 방해하지 않는 시적 장치이기도 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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