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람과 세월]화려한 무대 뒤의 '야전사령관'…김봉수씨

대구시민회관 34년 산증인

무대감독 사무실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1층 플로어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의 좁은 공간. 기계실과 조명실 사이에 끼인 사무실은 한기로 냉랭했다. 낡은 탁자와 의자 네개, 오래된 철제 책상이 다인 이곳에서 그는 반생(半生)을 보냈다. 김봉수(60) 무대감독. 1975년 대구시민회관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34년 동안 시민회관의 무대감독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여기서 대구 공연의 역사를 지켜봤다. 개관 당시 극장 스태프 동료 15명 중 남은 사람은 김 감독 혼자다. "제가 살면서 이사를 열아홉번을 했어요. 그런데 직장은 여기 한곳이었습니다. 내 집보다 더 정이 들었지요."

#시민회관 1세대, 역사의 뒤안길로

김 감독은 스스로를 '시민회관 1세대'라고 했다. 그는 내년 6월 말이면 이곳을 퇴임한다. 공교롭게도 대구시민회관 리노베이션이 시작되는 시점과 겹친다. 대구시는 현재 시민회관을 개축,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2세대 시민회관'을 추진 중이다. 서울 국립극장(1972년 준공), 부산 시민회관(1973년)과 함께 1970~90년대 전국 3대 공연장으로 꼽혔던 대구시민회관. 김 감독은 얄궂게도 이곳의 문을 열고, 마침내 닫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이런 기막힌 우연에 비하면 그의 외동아들이 시민회관 개관과 같은 해에 태어난 것쯤은 작은 우연이라 하겠다.

"개관을 두달 앞두고 국립극장과 부산시민회관에서 3일 동안 교육받은 게 전부였어요." 구청 건축과에서 대구시민회관으로 발령받은 그에게 떨어진 첫 과제는 개관 기념 연주회 준비. 합창단 150명이 동시에 설 수 있는 7단 단상을 만드는 일이었다.'니쥬'(이중'二重), '쓰리'(무대장치를 거는 바텐) 등 일본어투성이의 무대 용어는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선배 기술자들을 따라다니며 그 용어를 일일이 받아 적고, 그 옆에 뜻을 적었다. 그렇게 첫번째 공연을 무사히 치렀다.

대구시민회관 개관은 대구 공연 역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당대 최고 건축가 고 김인호가 설계한 시민회관은 현재까지도 걸작 건축물로 꼽힌다. 당시 시공을 한 한국건업이 시민회관을 짓고 적자를 봤다는 소문까지 났을 정도로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동경 '제국극장'을 모델로 했다 하니 건물의 위용이 대단했어요. 10년 전에 바닥에 카펫을 깔면서 음향이 나빠졌지, 그 전에는 금난새씨도 '음향으로는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김 감독은 이곳에서 모든 종류의 공연을 지켜봤다. 그러다 어느새 오페라 마니아가 됐고, 클래식 애호가가 됐다. 개관 첫해 본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하도 공연을 많이 보다 보니 어떻게 순서를 짜야 공연이 매끄러울지 훤하게 됐다.

무대 뒤에선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 "어떤 스타는 스태프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압적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러 20~30분 늦게 무대에 나타나기도 해요. 정말 매너가 없는 거죠. 반면에 가수 김장훈씨는 얼마 전 대구 공연이 끝난 후에 분장실 청소까지 직접 하기에 깜짝 놀랐어요." 그는 연극인 고 이필동 선생에 대해서도 추억했다. "참 소탈하고 격의 없는 분이었지만, 연극에 대해선 철저했다"며 "정말 본받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당시 연극은 지금보다 더 춥고 배고픈 장르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식당 주인들이 외상 밥값을 받겠다며 단체로 공연장에 쳐들어 온 것. 그 연극인은 자신의 시계를 풀어 쥐여주곤, 가까스로 막을 올릴 수 있었다.

#조명이 꺼진 뒤 빈 공연장의 고독

김 감독의 부친은 대구 '자유극장'의 간부였다. 그 덕분에 김 감독은 극장에서 뛰어 놀며 남부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월세방 신세까지 져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가 "열아홉번이나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대감독이 어떤 역할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 감독은 한참 말이 없더니 "야전사령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고독한"이라고 했다. "뭐랄까. 막이 내린 텅 빈 공연장을 보면 참 쓸쓸해요. 화려한 조명이 벗겨진 무대를 가까이서 보면 더 그래요. 가면을 벗는다고 해야 할까. 자정이 다 돼서 극장 문을 잠글 때면 허무하단 생각도 들어요."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공연 뒷정리를 하다 극장에서 잔 적이 태반이었다. 어떤 날은 역전 파출소에서 통행증을 받고 혼자 중앙통을 터벅터벅 걸었다. "버스는 이미 끊겼지, 다니는 차는 없지. 깜깜한 도시를 혼자 걷는 느낌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고독하더군요." 그래도 그는 10여년 전 대구의 모 공연장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 자부심 하나로 거절했노라고 했다.

무대감독은 공연을 총지휘하는 사람이다. 공연을 무사히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이 그의 소관이다. 깜깜한 무대 뒤에서 발에 걸려 넘어질 만한 물건들을 치우거나, 난방 세기를 조절하고, 스태프 회의를 조정하는 일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11년차인 조명감독 이대우씨는 "감독님의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는다"고 했다. 공연준비는 종종 뜻밖의 상황과 부딪힌다. 지난해 뮤지컬 '캣츠' 때다. "15t 짜리 무대장치를 '바텐'에 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바텐으로는 그 정도 중량을 못 이기거든. 그래서 공연장 천장 일부를 뜯어내고, 천장에 직접 장치를 고정시켜야 했지요."

2000년 1월 대구시민회관 운영권이 시설관리공단으로 위탁되면서 직원 수는 줄고 일은 늘었다. 개관 당시 15명이던 공연 스태프는 현재 6명. 그는 "몸집에 비해 스태프 수가 너무 적다"고 말했다.

#인생 2막은 '하우스 매니저'로

그는 퇴임 후 객석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하우스 매니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우스 매니저란 관객들의 입장을 돕거나 관객 대기 상황을 살피는 등 관객 편의를 위한 모든 일을 담당한다. "공연 스태프 분야가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어요. 그만큼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세부 분야가 발전한 거지요." 그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살려 대구의 다른 극장에서 일을 해보고 싶노라고 했다.

김 감독은 시민회관 리노베이션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다목적 공연장이 클래식 전용관으로 바뀐다는 데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시민회관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장르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용관을 짓는다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1층 무대 뒤로 향한 그가 우뚝 멈췄다. 조용히 무대를 둘러본 그는 "아직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년이면 사라질 옛 시민회관에 대한 회한인지, 김 감독 자신을 가리키는 얘기인지 몰라 그 옆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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