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모(鄭石茅'1922~1987)는 경산 출생으로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를 수학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많은 문예지를 탐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대구에서 청마 유치환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목화'라는 시로 추천을 받았으며, 모윤숙이 심사위원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6'25전쟁이 일어나 문학적 야심을 접어야 했고, 시집 '목화' '고엽' 등을 남겼다.
그는 가진 것은 없었으나 문심(文心)만은 넉넉했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실수가 잦았고, 때로는 위험한 시국 관련 발언을 마구 쏟아내다가 끌려가 고초를 겪었는가 하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사찰을 받기도 했다. 그뿐이랴. 동료 문인들을 향해 듣기 거북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대가라도 소용이 없었으나, 오로지 한 사람 박양균 시인은 예외였다. 그것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에 대한 배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석모는 한동안 살던 집의 대문을 가마니로 가릴 정도로 곤궁했었다.
그는 일본말을 잘했고, 일본 노래와 기타 연주 솜씨도 뛰어났다. 일본말로 '인생은 갈대'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그가 노래를 부르면 다들 최면에 걸린 듯 빠져들었고, 그 가운데서도 우수의 시인 서정희는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서정희는 당시 경북도청에 근무하면서 '도정월보'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호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문인들에게 원고료를 선불해 주거나 영화관을 안내하는 등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 저런 인연으로 해서 정석모는 서정희를 무척 좋아했었다.
1961년에 있었던 이야기다. 서정희의 첫 시집 '배암'의 출판기념회가 중앙로 YMCA 2층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서 청마 유치환은 '시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 인간이 있고 문학이 있다. 나는 이 시인을 참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낮술에 취한 정석모는 서정희를 향해 '네까짓 주제에 문학은 무슨 문학'이냐며 삿대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붓고 소란을 피우자, 보다 못한 김용성 화백이 정석모를 끌어안고 창 밖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 바람에 뜯어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1963년 어느 가을날의 이야기다. 당시 원화여고 교사로 있던 김원중 시인을 만나 개인전에 쓴다며 학교의 액자를 빌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 같은 부탁을 받은 김원중 시인은 난감했다. 고민 끝에 학교의 문예반에서 사용하던 액자 20여 개를 빌려주었고, 시화전은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시화전이 끝나도 액자를 돌려주지 않고 모두 팔아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궁리 끝에 박양균 시인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액자 값의 절반을 도움 받아서 사태를 수습하였다고 하니 김원중 시인으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셈이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몇 달 뒤 어느 날, 동성로에서 김원중 시인을 만난 정석모가 액자를 돌려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다고 극구 사과하면서 다방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커피 한잔을 사주고 난 뒤, 밖으로 나오면서 "김형, 집에 가는 버스 값 좀 빌려주시오" 하며 손을 내밀더라나. 아마도 어이가 없었으리라.
그는 지병으로 이승을 하직했고, 청구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생전에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이재행 시인의 주선으로 그의 시 '능금 두벌꽃'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를 읽으며 지난 세월을 떠올려본다. 아, 인생무상이라 하였던가.
바늘 끝만치/ 귀뚜리 갈빗대도 닳아버린/ 세상에// 예감-/ 꼭 무슨 기별이 올 것만 같은/ 마리아의/
그때의 그 두 볼// 사랑이 아니면/ 입김이 아니면……// 몸체로의 대답이 지레 피어난 것이다.
- '능금 두벌꽃' 전문
우리네 사람살이의 밑바닥에는 슬픔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 강물의 한 자락을 들추어 잡고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멋이다. 그 같은 멋은 슬픔이 슬픔에 그치지 않도록 해주는 힘이자 애정과 유열이 되었으며, 도피를 위한 몸부림이 아닌 창조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되었다. 그와 함께 고단한 사람살이의 탈출구가 되기도 했다. 그 같은 감정 조절에 뛰어난 사람이 예술인들이다. 그래서 예술인들은 틀에 박힌 삶을 싫어하고, 늘 일탈과 파격을 꿈꾸기 마련이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네 사람살이, 멋을 아는 사람들이 그립다.(이 글이 고인이나 유족에게 누를 끼쳤다면 용서 바랍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