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법(家法)을 따라 흘러온 50년 세월, 그리 덧없지는 않았어요"
영양읍에서 반변천을 따라 31번 국도로 10여분 북쪽으로 달리면 일월산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영조 4년(1728년) 이인좌난 때 오삼달 장군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장군천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918번 지방도를 따라 4㎞ 지점에 이르면 아득한 농촌 마을이 보이고 이 곳에 고색창연한 고택이 서너 채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야성 정씨 동성마을이다. 이 중 가장 첫 번째 홍살문이 높이 솟은 집이 바로 임진왜란 때 김제 군수로 전라도 웅치전에서 순국하신 정참판 정담(鄭湛) 장군의 15대 종손이 살고 있는 일헌종택이다.
정참판은 울진군 사동리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자손은 영해 인량리에서 200여년 동안 살다가 1800년에 이 곳 가곡으로 왔고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집은 학자의 집안도 아니고 벼슬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라에 목숨을 바친 충신(忠臣)의 집이라 할 수 있지요."라며 종부는 종가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일헌 종가는 선조 16년(1583년) 36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부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김제군수로 제수되었고 의병장 황박과 나주판관 이복남 등과 연합하여 전주를 방어하다가 웅치에서 전사한 일헌 정담 선생의 종가이다.
왜적도 공의 충절에 감복하여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서를 세울 정도였다 한다. 1593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됐으며 순조시에는 장렬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현재 이 장렬공 사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사당 옆에 일헌 종가가 위치하고 있다.
◆그 당시 스물넷, 나이 많은 노처녀랬지
한국전쟁이 끝난 지 8년이 지난 1961년, 전쟁 끝에 모든 것이 피폐해진 때에 민심도 흉흉했지만 종부가 살던 영해 관어대는 유난히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이들의 대립이 심했다.
이들의 대립 속에 어느 곳에도 들지 않았던 종부의 아버지는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세련된 신사였다. 이 신사의 맏딸, 그러니까 종부는 나이 스물넷에 일헌 종택의 종손을 만나 혼인을 했다.
"아이구, 노처녀래도 나이가 많은 노처녀랬지요. 그 당시에 스물넷이면 뭐" 단촐하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만이 생활하던 핵가족 사회에서 자랐던 종부는 종가가 무엇인지, 종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집을 왔었다고 한다.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사당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깜짝 놀랐지. 내가" 이제는 종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매일 만나게 되는 사당이지만 핵가족 속에서 생활하던 새색시가 처음 본 사당과 그 예법은 많이 놀라웠다.
시집을 오니 막내 시동생이 네 살, 함께 지내는 가족만도 열명이 훨씬 넘었던 데다 열네 번의 제사와 어려웠던 시댁의 살림살이는 종부를 지치게 만들었다.
◆ 시집와서 처음엔 제사 14번 지내
종부의 삶이 힘들어 때로는 한숨도 쉬었다. 하지만 "내가 편하고 편리하려면 제사는 안 지내는 게 낫지요"라는 종손 정재홍씨의 위엄 있는 말 한마디에 "다 어렸을 때부터 하던 예법인 걸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든 거 아니겠어요"라며 수줍게 웃어 보인다.
처음 시집올 때 열네 번이던 제사가 길제(吉祭)를 두 번이나 지내고 나니 아홉 번으로 줄어들었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지만 한 번도 떡을 사서 제사를 지내 본 일은 없었다.
요즘도 영양 읍내에 나가면 사람들이 일헌 종가의 종부를 보고 사람들은 '양반집 아지매'라고 한다. 종부가 접빈객이나 봉제사를 위해 쌀을 찧으러 가면 모든 사람들이 그 양을 보고는 떡집 한번 해보지 그러냐고 권할 정도로 자주 떡을 할 뿐더러 '웃기'라고 하는 잔편이 여섯, 일곱 가지씩 올리는 것을 보면 그 엄청난 양에 사람들이 구경을 올 정도다.
너나없이 다 어렵던 시절, 종부가 처음 일헌 종가로 시집 왔을 때 종가의 살림도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았다. 종가를 찾아오시는 손님에게는 보리쌀밥이나마 대접하고자 애쓰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50년 세월이 흘렀다며 웃으시는 종부, 그래도 새며느리가 물을 이고 오는 걸 보면 안쓰러워 아들에게 대신 물지게 지라고 시키는 시아버지가 계셨고, 평생 아내만 바라보며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어 든든했다고 한다.
"우리 사랑어른이 참, 나를 세상없는 며느리로 사랑을 해줬어요. 겨울에는 꼭 솜 넣은 명주바지를 해 입는 꼿꼿한 양반이셨지만 며느리 사랑은 남달랐지요. 넉넉지도 못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예법 이외에는 입밖에 낼 수도 없고 그렇게 평생 살았지요. 이제 돌아가신 지 벌써 20여년이 되었는데 제대로 효성 드리지 못한 게 한스럽지요."
◆ 첫아들은 친정에서'''둘째'셋째는 시댁서 낳아
현재 종부에게는 아들만 삼형제가 있다.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첫아들 을 낳았을 때가 종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을 때였다고 한다. 첫아들은 혼인 후 묵신행을 할 때 친정에서 낳았다. 혼례를 치르자마자 아이가 생겨서 처음에는 부끄럽기만 했다는 종부, 그래도 임신과 출산을 친정에서 할 수 있어서 그 마음만은 편하고 풍성했었다한다. 3년 뒤 둘째 아들, 2년 뒤 셋째 아들은 시댁에서 낳았는데 삼칠일을 쉬었지만 친정에서 출산했을 때와는 마음이 많이 달랐단다.
이제 삼형제는 장성해서 다 혼인을 하고 며느리도 셋이나 있어 행복하다는 종부. "우리 애들이 이제 들어와서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바뀐 세상에 다 맞출 수도 없고,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그래 적당히 잘 해야지요."
일헌 종가에는 예부터 돌잔치가 없다. 어른들 있는 집에 아이들 잔치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아직도 아흔넷이신 시어머니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칠순 잔치도 손자들의 돌잔치도 안했다는 종손과 종부다. 선뜻 취재에 응해 주신 것이 너무 고맙다 말씀 드렸더니 "아이고 아니래요, 이래 보잘것없는 사람을 찾아와줘서 내가 고맙지요"라며 진하게 끓인 대추차를 내주신다. 종부가 살아온 50년의 세월, 꼭 종부가 내온 진하디 진한 대추차와 비슷했다.
(사)안동축제관광조직위 김은정 vkehdi@hanmail.net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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