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부](20)풍양 조씨 오작당 채춘식 여사

"음식'손님 접대 싫어하면 종부 자격 없지요"

12월의 마지막. 종부이야기도 마지막으로 접어 들었다. 그 마지막 이야기를 상주 풍양 조씨 호군공파 오작당 종부에게서 듣기로 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상주 양진당 옆 오작당에서 11대 종부 채춘식(75)여사를 만나 그녀의 종부 이야기를 들었다.

◆ 지난 잘못 고쳐 두번 과실 하지말라는 뜻

"후손들이 지난 잘못을 깨달아 고쳐 과실을 두번 다시 않도록 하라"는 뜻의 오작당(悟昨堂)이다. 한편 생각하면 선조님의 지혜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특히 바깥마당에서 사랑채 마루까지 6계단, 안채 마루까지 12계단을만들어 건강을 염두에 둔 건물이다.

오작당은 민속자료의 지방문화재로 양진당보다 25년이나 앞서 양진당 자리에 세웠던 것을 옮겨 놓았다. 겹집과 홑집이 공존하는 건물로 중후한 감을 느끼게 한다.

오작당은 일명 구당이라고도 하는데 검간(黔澗) 조정(趙靖)선생의 종가로 처음은 선조를 추모할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1601년(선조 34년) 검간선생이 요포(현재의 양진당 자리)의 옛터에 지었다가 1661년(현종 2년) 조대윤 선생이 은천의 새터(新基'승곡리 자연부락)로 이전했다. 이전 당시는 모두 40여 칸이었으나 1781년(정조 5년) 중수시 겹집과 흩어짐이 공존하는 건물이 됐으며 양진당의 원초형이다.

부재(部材)의 세장한 조각, 기둥의 모접과 격자창 등은 고식의 중후감을 더한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사당 등 3동이 남았다. 오작당으로 처음 이전한 입재(立齋) 조대윤(調大胤)선생은 문명(文名)을 얻은 선비였으며 특히 일가의 친목을 도모하려면 목연(睦姸)이란 계를 조직해 가문의 흥창을 도모한 선비이기도 하다.

◆ 형편 넉넉한 어린시절'''엄격했던 가정교육

그녀의 고향은 예천 산양 현리이다. 7남매 중 6째로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 서울대 의대를 나온 오빠가 병원을 개업하면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 덕에 부족함 없는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먹고 살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으나 아버지에게는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여자는 삼종지도를 지켜야 하며, 시집을 하면 그 곳에 응하며, 친정에는 자주 오지 말며, 시집의 말을 친정에 와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교육을 받았다.

내부적으로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씀을 들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서울 상명여중을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나면서 고향으로 다시 내려오게 됐다. 7남매 가운데 3남매는 이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영주여중을 1회로 졸업하였다. 중학교를 마치고 안동여고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혹시나 딸이 나가서 연애하고 다닐까 염려해 그리 허락하지 않아 중학교만 나온 채 현동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아주 엄격한 시조모와 손님 많은 종가

23세가 되던 해에, 이곳 오작당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당시에는 종가로 보내면 시집을 잘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막상 시집을 와 보니 현실은 4대 봉사, 2번의 묘사, 2번의 불천위 제사, 명절제사 등 1년에 모두 14차례의 제사가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시조부보다 무서운 시조모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할머니는 동네에서도 무섭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오작당 앞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시조모님과 여러 일화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한 가지가 있다.

한번은 김치를 너무 많이 담가서 혼이 난 적이 있어 반찬을 적게 담았더니 "너는 과객이냐"라고 하며 상을 엎어버린 일화가 있다고 한다. 시조모님이 상을 엎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는데, 옆에 어린 자신의 아들이 기어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을 엎는 일을 많이 반복했다.

음식을 가지고 간이 안 맞다며 투정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또 그녀에게 있어서 고된 시집살이의 쉬는 시간은 밥 먹고 난 후 아이에게 젖을 물려줄 때인데 그마저도 시조모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젖을 물리라고 하였다. 밥을 먹으며 젖을 물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밥을 다 차려주고 남은 찬밥을 먹으며 젖을 물렸다고 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3년 만에 대구로 가다

그녀의 남편 즉, 종손이 은선광업소에서 일을 하다가 동아건설로 가게 되면서 남편을 따라 대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편을 위해 떠난 것도 있지만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자 그녀를 데리고 간 것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구로 갔다고 하여 제사를 소홀이 하지는 않았다. 제사가 있을 때나 행사가 있을 때 대구에서 장을 봐서 남편과 함께 자주 왔다갔다 하였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오작당을 왔다 갔다 하였다. 이런 생활을 27년을 했고 28년째 되던 해부터 4대봉사는 대구에서 모시게 되었다. 그렇게 3년 후 시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오작당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다른 친척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옆집에서는 매일매일 잔치를 하는 것으로 알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노력을 너무 많이 해서 탈이라고 하였다. 집에 손님이 오면 그냥 음료나 다과를 차려 나가면 되지만 그녀는 그렇게 고집하지 않는다. 최대한 예쁘게 최대한 정성껏 그렇게 노력해서 정성스레 담아 나가서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하다고 말을 하였다.

그렇다. 그녀에게 종부로써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자 "종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옆에서 종부라고 대접을 해 주면 그에 맞는 '종부의 도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고 한다. 어른을 공경하고 손님접대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여야 된다고 덧붙었다. 그리고 그게 싫으면 종부자격이 없다는 말 또한 빼먹지 않았다.

(사)경북미래문화재단 사무국장 임종교 belbrige@nate.com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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