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 때를 놓치면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책을 다시 잡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잘하든 못하든 계속 공부를 한 사람에 비해 노력과 시간도 몇배나 쏟아부어야 한다. 특히 만학도들의 경우 공부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버겁다. 학습 중단이 수십년 이상 지속되면서 공부의 연계성이 깨어졌으며 두뇌 회전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학도들은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을 실천하며 손자들 틈에서 공부를 하는 만학도들이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이유다.
노인학(71'달서구 진천동)씨는 2009년에 치뤄진 고졸검정고시 대구지역 최고령합격자다. 4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7명의 손자'손녀를 둔 노씨가 고령의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배움에 대한 그리움이다. 대구가 고향인 노씨는 중학교를 5년만에 졸업했다. 중학교 다닐 때 6'25전쟁이 터져 학교를 다니다 2년을 쉬는 바람에 학습기간이 길어졌다. "난리통에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뭘 배웠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세상이 어수선해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다. 그러다 해병대에 입대를 했고 제대 후 장사, 택시운전, 가구점 운영 등 여러가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기에 바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노씨는 배움에 대한 욕망은 늘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를 제대할 무렵 국가에서 경찰관 특채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자격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못한게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공부에 대한 마음은 있었지만 실천을 하지 못했던 노씨는 95세의 나이에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는 노인의 수기를 우연히 읽고 용기를 얻어 2007년 9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등록할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고생을 사서 하냐"고 말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행복했다.
배우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노씨는 처음 수업을 받았을 때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몇십년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아 중학교 때 배운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특히 발목을 잡은 것이 영어와 수학이었다. "영어와 수학은 기초가 중요한 과목입니다. 그런데 기초가 되는 내용도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수학은 초등학교 때 배운 분수 정도만 겨우 이해할 수 있었고 영어는 아예 알파벳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학습을 따라 갈 수 없어 몇번이나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때마다 그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학원 선생님들이었다. 수업만 안빠지고 열심히 들으면 합격할 수 있다는 말에 힘을 얻은 노씨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공부를 했다. 어린 학생들에 비해 학습능력은 떨어지지만 한을 토해내 듯 열정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학원 수업시간에 가장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이 바로 노씨였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업을 마친 뒤 선생님을 붙잡고 씨름을 했다. 수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동영상 강의를 틀어 놓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돌아서면 외운 것을 잊어버리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업 내용을 프린트해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익혔다. 중학교 다니는 손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오전 학원 수업을 마친 노씨는 주로 밤과 주말을 이용해 공부를 했다. 몇년전 가구점을 딸에게 물려준 뒤 소일삼아 학원버스 운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오후에는 공부할 틈이 나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 일을 마친 그는 집에 와서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부족한 공부시간은 주말 동안 보충했다.
지난 4월에 치러진 검정고시를 앞두고는 일을 잠시 그만뒀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다시 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잃을 각오를 하고 4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노씨는 시험때 수학문제지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게 어렵게 여겨졌던 수학이 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씨는 공부를 시작한지 1년 6개월여 만에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절반에 마친 셈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 오랜 공부 공백기간, 넉넉하지 못한 공부시간 등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합격이다.
노씨는 지금도 학원을 다니며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그의 컴퓨터 실력은 수준급이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전 일찌감치 컴퓨터를 배워둔 까닭에 손자'손녀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는 것은 기본이다. 포토샵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노씨는 지금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세가 되기전에 4년제 대학을 졸업할 계획입니다. 대학에서는 컴퓨터, 사진 또는 부동산학을 전공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은 이기지 못합니다. 열심히 하면 분명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며 활짝 웃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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