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근대미술 산책] 설경 또는 겨울…수묵담채의 동양화 같은 풍경화

설경 또는 겨울 풍경

작가: 우현 박명조(又玄 朴命祚 1906~1969)

제작연도: 연대미상 (1950년대로 추정)

재료: 종이에 수채

크기: 26.5 × 58㎝

소장: 개인(박풍) 소장

요즈음 연이은 한파와 폭설 뉴스가 사방에서 들려오니 자연히 눈(雪) 그림에 생각이 간다. 따로 제목은 없지만 이 동양화 같은 분위기의 수채화는 황량하게 펼쳐진 메마른 들녘처럼도 보이지만 먼 산을 보면 분명 눈 덮인 농촌 마을의 맑게 갠 날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며칠씩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속에 고립된 마을의 적막한 광경을 상상하면 제대로 겨울 맛이 나는 경치다. 텅 빈 들과 구불구불한 황톳길,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볕이 잘 드는 초가들이 옹기종기 이웃하고 있는 이런 마을 모습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우현 박명조는 대구 화단의 역사에서는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대구에서 개최된 가장 이른 시기의 전시회로 기록된 1923년 '대구미술전람회'의 서양화부에 이여성, 이상정과 같은 인물들과 함께 참여한 것에서부터 1926년 그의 나이 20세 때 일본인을 제외하고 대구서는 가장 먼저 제5회 조선미전에 입선했으며 그해 양화 개인전까지 연 작가다. 여섯 살 위인 소허 서동진보다 1년 앞선다. 다시 한 해 건너 7회 그리고 10회부터 14회에 이르기까지 선전 연속 입선경력 쌓아갔으나 화가로서 왕성한 그의 대외 활동은 뜻밖에도 대략 그즈음에서 멈춘다. 더 이상 활발한 발표의욕을 보이지 않고 일찍 두각을 나타냈던 화재(畵才)를 조용히 혼자만의 작업으로 소진해나갔다. 그는 선전 7회 때 입선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그림에 더 몰두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

이 작품의 특징은 화면을 크게 상하로 나누는 수평구도가 너른 들을 조망하는 평원산수에서처럼 안정감과 함께 편안한 전망을 제공한다. 오직 마을로 들어가는 길과 나무의 수직적인 배치만이 평면적인 화면에 원근감과 깊이를 암시하고 또 고요를 깨면서 화면에 생기를 일으킨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동리 입구의 큰 느티나무는 하늘을 향해 벌린 가지들의 형상으로 인해 더욱 주목된다. 남종문인화의 수묵 담채 기법처럼 간결하고 단순한 채색과 묘사는 이 작품을 영락없는 한 폭의 산수화로 느끼게 한다.

주로 수채화가 다수를 차지하는 그의 유작 가운데는 일부 독특한 화풍의 유화들이 발견되어 눈길을 끄는데 이런 동양화풍의 그림들 역시 예외적이다. 순일하게 안거하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듯도 한데, 그러나 이 그림에는 필시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를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의 하나로 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는 전통 서화의 기법에서 새로운 변화의 해법을 찾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이 작품과 거의 같은 장면에 인물을 그려 넣은 또 다른 그림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에는 '우현 시작'(又玄 試作)이라고 서명해놓고 따로 관지는 찍지 않았다. 기존의 재현적인 수채화로부터 나름대로 어떤 전환을 실험했던 것이 틀림없다. 먹을 재료로 인물을 연습한 붓 그림이 다수 있고 그것을 풍경 안에 적용해본 예도 있다.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와 다소 거리를 둔 표현은 사실 그의 초기부터 나타난 개성이다. 당시 그의 그림은 서동진의 화풍과 비교하여 "색채며 필치(筆致)가 낭만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아카데믹크』를 벗어난 경향(傾向)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추상화가 배경에 걸려있는 사진도 있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그림의 동양화 같은 분위기도 전통적인 풍경의 재현을 얻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현'(又玄)이란 서명에 주문방인으로 낙관까지 한 것은 그 결과에 만족했다는 뜻이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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