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다 더 졸릴 수는 없다. 밀려오는 졸음 사이로 훔쳐보니, 마누라는 이미 꿈나라에 빠져들었고 딸아이만 하릴없이 멍한 눈빛으로 먼 나라를 헤매고 있다. '전 세계를 사로잡을 지상 최대의 쇼!' 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탄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압도적 순간의 나열'이라는 실망에 겨운 탄식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예고편 이상의 기대는 금물!'이라는 경고문을 무시한 스스로의 무심함만 새삼 곱씹어보면서.
영화 '나인'(Nine·2009년)의 시작은 실로 창대하였다.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익히 떠받들여지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자전적 영화 '8과 1/2'(Otto E Mezzo·1963년)의 후광을 업고서, 이를 바탕으로 한 이탈리아 뮤지컬을 다시 브로드웨이에 올려 1982년에 토니상까지 받으면서 대중적인 검증까지 마친 터다. '시카고'(Chicago·2002년)를 통해 뮤지컬의 영화화에 신기원을 이룩한 바 있다는 롭 마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아련한 전설 속의 소피아 로렌까지 끌어낸 초호화판 출연진에다, 할리우드의 무지막지하도록 막강한 화력지원까지. 그러나 여기까지다. 신기루 같은 예고편은 끝나고, 더 이상의 본편은 없었다. 거장의 작품 번호이기도 한 '8과 1/2'에 모자라는 1/2까지 마저 채워서, 드디어 '9'를 완성하였다는 무지무지 용감한 한바탕의 쇼. "차라리 '제로(0)'라고 제목을 붙이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어느 비평가의 독설에 재삼 고개를 주억거리며 극장을 나섰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옛말은 여전히 힘이 세다. 그렇다고 욕심만 앞세워 마구잡이로 꿸 때는 아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절세미인들의 보배로운 이목구비만 고르고 골라서 꿰맞춘 얼굴이 도리어 흉물스럽기 십상이듯 말이다.
"조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 됨이다. 전체의 각 부분 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백번 지당하나 막상 지키기가 녹록지 않다. 남의 밥에 든 콩이 더 굵어 보이고, 같이 우물 파고 저 혼자 먹고 싶은 게 여느 꿍꿍이속이다.
"'나쁘다'의 어원은/ '나뿐이다' 아닐까?/ 세상엔 '나' 말고도/ '너'도 있고/ '그'도 있는데/ 그 이치/ 모르고 사니/ 나쁠 수밖에 없잖은가." (문무학의 '낱말 새로 읽기 55-나쁘다')
뻔히 보이는 말놀이에서 문득 사람살이의 뻔한 부끄러움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만의 대박에, 나뿐인 요행에만 목매달지 말자. 너와 그들과 어우러져 좋은 복 많이들 지어서, 더 흐뭇한 우리들의 행복으로 거두어들이는 새해 새날이기를 꿈꾸어 본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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