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이름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 울진 소나무가 그렇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성장도 그만큼 느리고 잘 썩지도 않는다고 붙여진 수식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인은 사용조차 못하고 왕실과 일부 사찰에서만 쓸 수 있었다. '황장목'(黃腸木)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지만 붉은 빛을 띤다는 이유로 적송, 황금빛이 나서 금강송으로 불리며, 특히 울진에서 자생하는 금강송은 2000년 6월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울진소나무'로 이름붙여졌다.
이 소나무가 길을 따라 봉화 춘양역에 모여 다른 곳으로 거쳐갔기 때문에 '춘양목'이라는 이름도 얻게 됐다. 대게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영덕, 울진도 아닌 포항 구룡포다. 하지만 영덕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영덕 대게'가 대명사처럼 됐다. 강산이 두번 변하는 긴 시간을 거쳐 최근 완전 개통한 7번 국도는 울진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었다. 극장을 찾거나 병원에 갈 때 포항보다 시간 거리가 가까운 동해나 강릉을 택한다.
이번에 찾아간 왕피천 계곡길도 마찬가지다. 그 옛날 참숯을 지고 힘겹게 오르내리던 수십 리 계곡길은 최근 생태탐방로로 새롭게 거듭났다. 그곳으로 찾아가보자.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울진 성류굴 가는 길로 접어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성류굴 쪽 대신 남쪽으로 길을 잡아 구산2교를 건넌다. 이후 갈림길마다 '왕피천 아홉굽이 굴구지 산촌마을' 표지판이 길 안내를 맡는다. 넓은 길도 잠시.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숲길은 차를 타고 휑하니 지나기에 아까울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걷기에는 너무 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모롱이를 돌아선다.
산 아래 햇살 따스한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40가구 7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 '굴구지'. 영양에서 울진으로 이어지는 65km 길이의 왕피천 하류에서 내륙쪽으로 아홉 고개를 넘어야 마을이 있다고 해서 구고동 또는 굴구지로 불린다. 마을 아래로는 왕피천이 굽이 돌고, 위쪽에는 새로 지은 예쁜 집 한 채가 보인다. 얼마전 문을 연 '굴구지 산촌체험펜션'(www.gulgugi.co.kr / 054)782-3737). 방 이름도 예쁘다. 6인실은 복숭아, 살구이고 8인실은 참나무, 음나무이며 15인실은 금강송, 송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한다. 봄이면 산나물캐기, 여름엔 대나무 피라미낚시, 가을엔 금강송 송이 구워먹기, 겨울엔 논썰매타기를 비롯해 감자떡 만들기, 콩칼국수 만들기 등 다채로운 체험도 가능하다. 산악용 자전거도 갖춰놓았다. 하룻밤 묶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짧은 겨울 해를 원망하며 발길을 옮긴다.
##왕피천은 국내 최대 생태경관보전지역
왕피천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전체 면적만 102.84㎢(약 3천116만평)로 북한산 국립공원의 1.3배에 이른다. 1989년 이후 전국적으로 생태경관보전지역 29곳이 지정됐다. 우리나라 전체 보전지역 면적 중 40%를 차지하는 곳이 바로 왕피천이다. 방대한 규모다. 수달'산양'매'삵'담비 등 멸종위기동물과 노랑무늬붓꽃 등 희귀식물이 사는 그야말로 '자연의 보고'.
오늘 찾는 길은 최근 개통한 생태탐방로 5km 구간이다. 근남면 구산3리 굴구지 마을에서 서면 왕피리 속사까지 이어진다. 길 안내는 울진군 환경정책담당 이성호씨가 맡았다. 이곳 생태경관 보존지역 지정은 울진군과 녹색연합이 발 벗고 나서 2000년부터 추진됐고 2006년 결실을 맺었다. 지난해 생태탐방로를 만들며 이성호씨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이 길을 다녔다고 한다. 그는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5km 구간을 둘러볼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3분의 2 정도를 갔을 뿐인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포함해 얼추 4시간을 걸었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중간에 사진을 찍느라 잠시 시간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1시간 30분에 전체 구간을 돌아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가파른 산길을 뒷짐을 진 채 미끄러지듯 걷는 이성호씨에게 취미를 물었더니 마라톤이라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상천동 관리초소부터 5㎞ 탐방로 시작
생태탐방로는 '상천동 관리초소'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바위 틈새 고갯길을 내려서자 왕피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가을 풍성했을 밤송이가 지금은 갈색 껍데기만 남긴 채 바닥에 가득하다. 산밤이다 보니 알맹이가 작고 보잘것없다. 재미로 딸지언정 먹기에는 영 마땅찮다. 계곡으로 내려서자 비경이 펼쳐진다. 사실 왕피천은 이름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로 여름이면 제법 북적이지만 여느 유명한 계곡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숫자가 적다. 접근이 너무 어려운 탓이다. 이번 생태탐방로도 옛날부터 내려오던 계곡길과 산길을 정비해 놓은 것. 길이는 5km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산과 계곡이 만만찮다. 하지만 사람 손을 덜 탄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 생태탐방로를 만들 때만 해도 목재 데크로 다리를 만들고 방책을 세우는 것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잖았다. 그만큼 자연을 해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겨울 계곡은 사박사박 걷는 발소리 외에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계곡을 따라 걸을 때는 거친 물소리가 경쾌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고요함이 잦아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중턱마다 미끄러진 자국들이 어지럽다. 멧돼지가 오간 길이다. 낮이면 녹았다가 밤이면 얼어붙는 흙길에는 동물 발자국도 적잖다. 그들만의 세상에 사람들이 찾아와 괜스레 어지럽히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진다.
##40리길 오르내리며 참숯 져 나르던 길
제법 편한 길도 있지만 대체로 험한 편이다.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아예 길이 없는 계곡 쪽은 삐죽삐죽 날이 선 돌들이 위태롭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금강송이 빼곡한 숲길을 돌아서면 나뭇잎을 다 떨군 참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낙엽이 길을 덮어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발목이 푹푹 잠긴다. 커다란 바위 사이에 나무 다리를 만들어놓았다. 다리가 없다면 거의 수직으로 내려선 절벽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선 뒤 다시 길을 올라야 할 판이다. 옛날 서면 왕피리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근남면 장터까지 오갔다. 탐방로 옆에는 '숯가마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처럼 생긴 돌무더기 속에 참나무를 넣고 숯을 만들었다. 먹고살 것이 궁하던 그 시절 산촌 마을 사람들은 숯을 구워 장에 내다팔고 먹을거리를 구해왔을 것이다. 지게 가득 참숯을 지고 왕복 40리길을 오고 갔을 그들의 모습이 산모롱이 돌아서 눈에 들어올 듯하다.
사연도 많았으리라. 숯을 팔아 쌀이라도 구해오는 날이면 제비 새끼마냥 입을 벌린 채 아비를 기다리던 자식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을 것이고, 산골짜기 짧은 해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도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내의 가슴은 숯보다 더 새카맣게 타 들었을 것이다. 한때 계곡에는 참나무가 타들어가며 내뿜는 연기가 가득했을 터. 땀과 숯먼지가 뒤범벅된 채로 노동의 신성함과 삶의 고단함을 말 없이 보여줬을 산사람들의 가쁜 숨결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들은 거친 길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터로 이어주는 생명의 길임을 고마워했다. 지난해 마을 사람들은 참숯 대신 탐방로를 만들 방부목을 지게 가득 짊어졌다. 중장비는커녕 차 한 대 들어올 수 없는 이 길을 닦느라 흘린 땀은 왕피천에 차고 넘쳤다. 행여 미끄러질세라 가파른 길 굽이마다 박아놓은 나무 기둥을 어루만질 때, 협곡을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를 내디딜 때 진심으로 고맙다며 눈물겨워해야 할 터이다.
##주변 풍광 뛰어나…3, 4시간 코스로 적당
겨울해는 짧다. 산골짜기 햇살은 잠시 방심할라치면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걸음을 서둘러 학소대(鶴巢臺)를 지난다. 충북 제천 송계계곡에는 송계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학소대가 있다. 왕피천의 학소대 풍광도 절경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왕피천 한가운데 섬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고, 그 위에 학이 집을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200년 전쯤 누군가 이 위에 조상 분묘를 만들었지만 홍수로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학소대를 덮을 정도의 홍수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큰 비가 내린 뒤였을 것이다. 오르고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면 송이바위, 거북바위가 있는 협곡에 다다른다. 그저 바위 모양을 보고 지은 이름인데, 기가 막히게 닮았다.
지난 길을 되짚어오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왕피천은 다르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의 맛이 다르다. 오전에 길을 나서 잰걸음을 옮기면 생태탐방로 중간에 도시락을 먹고도 오후 햇살이 남아있을 때 속사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차를 타고 굴구지까지 갔다면 돌아오는 길을 염려해야 한다. 왕복을 감안해 거북바위, 송이바위까지 보고 돌아오는 3, 4시간 코스가 적당하다. 초등학생 정도면 무난히 길을 오갈 수 있지만 험한 길도 일부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제법 일찌감치 돌아섰다고 생각했는데도 출발지인 '상천동 관리초소'에 도착하자 어스름 땅거미가 지려한다. 어둠 속에 묻혀가는 왕피천 계곡은 낮시간의 번잡함을 털어내고 잠을 청하려 한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울진군청 환경정책담당 이성호 054)789-671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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