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3시. 대구 달서구 도원동 한 주택 1층. '앞산마을학교'라는 간판 아래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명의 초등학생들이 둘러앉아 신발 주머니 만들기에 한창이었다. 천을 자르고 깁고 붙이는 재미에 빠져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방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줄 찐빵을 찌고 송편을 데우는 냄새가 구수했다. 오후 5시쯤 옆 건물 한쪽에서는 고교생들이 수학 수업을 하고 있었다. 현직 고교 교사가 자원봉사로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마을공동체가 함께 만드는 학교
'앞산마을학교'(053-295-9221)는 도시형 방과 후 대안학교다. 주체는 2005년 앞산터널 반대운동을 벌였던 이들. 개발 논리에 맞서 길고 힘든 싸움을 펼친 뒤 평가와 반성을 통해 내린 결론은 풀뿌리 주민자치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이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힘을 보태지 않는 싸움은 아무리 정당해도 진정한 성공을 이루기 어렵다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 2007년 8월 마을회관 성격의 '공간 앞산달빛'이 문을 연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앞산달빛'은 도시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먹고-놀고-가르치고 배우는 세 가지 영역에 걸쳐 실천에 들어갔다. 먹기는 가까운 곳의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사먹자는 지역먹을거리운동이다. 현재 봉화의 귀농자 생산공동체, 성주와 고령의 농민 등과 함께 월 2회씩 장터를 열며 지역먹을거리연대운동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다. 놀기는 주민들이 직접 공연을 준비, 진행하고 함께 즐기면서 마을 문화를 가꾸어나가자는 마을문화만들기 운동이다. 지난해 11월 말 도원고 강당과 도원성당 성모당에서 개최한 마을연극영화제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가르치고 배우기는 도시의 아이들이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마을공동체가 함께 학교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앞산마을학교가 '앞산달빛'이 열린 지 석달 만에 초등과정을 개설하고 2008년에 중고등 과정을 시작한 것도 교육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열의가 무엇보다 높다는 점을 반영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교육
'앞산마을학교'는 월~금요일 방과 후 2, 3시간씩 열린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공동체 생활을 익히고, 자신의 관심거리를 찾아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는 방법을 익힌다. 학원에 가지 않고도 경쟁력 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고려들이 담겼다.
초등학생의 경우 학습과 직접적 관계가 크지 않은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생태활동, 전통 놀잇감 만들고 놀기, 뮤지컬, 악기 연주, 요리, 도자기 만들기 등이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눠 다양하게 진행된다. 이에 비해 고교생들은 현실적 필요에 맞춰 교과 학습에 비중을 많이 둔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현직 고교 교사들이 와서 단기 학습관리를 해줘 학생, 학부모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중학생은 학습과 기타 활동을 반반씩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번 겨울방학 프로그램은 하나하나가 평범하지 않다. 초등학생들은 매일 오전부터 노작·예술 중심의 수업을 하고 있다. 16~17일에는 먹을거리운동을 통해 인연을 쌓은 봉화 춘양으로 겨울놀이 캠프를 다녀왔다. 중학생들은 13일부터 3박4일 동안 울진으로 야생체험을 갔다. 귀농가정에 보내 첫날만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한 뒤 이튿날부터는 먹고 자는 일을 자신들끼리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농가의 일을 도와 식사를 하고 방에 직접 불을 때는 등 도시에서는 꿈도 꾸기 힘든 일들을 경험했다.
고교생들에게는 이번 겨울방학의 의미가 더욱 컸다. 지난 일년 동안 주1회 연극수업을 하면서 준비한 창작극 '책상을 엎어라' 공연을 7일 50여명의 관객 앞에서 발표한 것. 극단 전문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대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연출하는 모든 작업을 스스로 해냈다.
23일에는 모두 철새기행을 떠난다. 야생독수리가 둥지를 튼 고령 개진에 들른 뒤 창녕 우포늪을 거쳐 오는 여행이다.
◆부모의 고민을 나누는 공간
'앞산마을학교'는 대안교육 형태를 띠면서 지역성이라는 독특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부모회의도 여느 학교에 비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다. 초·중·고 학부모회의를 매달 한번씩 열어 학교 운영에 대해 의견을 나누지만 모두의 의논이 필요한 사안이 있으면 수시로 모인다. 며칠 전에는 수업 중 한 학생이 교사에게 반항하는 일이 일어나자 그날 밤 10여명의 학부모들이 모여 최선의 해결 방안이 무엇인가를 두고 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사춘기 학생들의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모이는 일은 벌써 여러 차례 있었다. 가정 내에서 끙끙거리는 게 대부분인 자녀교육 문제를 집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가슴을 열고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도움이 된다.
지난여름 진행한 부자동행 프로그램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전에 없던 충격을 줬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지리산에 도착해 하루 종일 걷는 동안 온전히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다니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하루 10분도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던 부자가 하루를 꼬박 함께 지내다 보니 조금씩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다음달부터 자연스레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참가하는 탁구, 축구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직업 관련 프로그램을 아버지들이 직접 진행하는 기회도 가졌다. 기계, 약, 신체, 장사 등 아버지들이 평생을 바쳐온 일들을 아들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은 부자 모두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줬다. 학부모 중 달구벌버스 대표인 신기복씨는 학생들을 버스회사에 데려가 하루 종일 청소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돕는 기회를 줬다. 신씨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힘들어 하다가 부모가 이렇게 힘든 일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작은 일까지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며 "땀의 소중함을 느낀 것만으로도 좋은 교육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실험 중
'앞산마을학교'는 현재 달서구 도원동의 주택과 사무실 등 3곳을 빌려 운영한다. 초등학생 18명, 중학생 5명, 고교생 3명 등 학생 수가 많지 않은 데는 공간 부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도 소문은 참 빨랐다. 학교 이야기를 듣고 무시로 전화가 걸려오는 건 물론 인근으로 아예 이사를 오는 이들까지 하나 둘 생기고 있다. 김현서(도원초 4년)양은 지난해 11월 북구 침산동에서 이사를 왔다. 김양은 "매일 다른 만들기와 놀이, 악기 연주를 하는데 너무 재미있다"며 "이사를 오고 나서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여러 가지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이사올 만한 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만 10여명이라고 한다.
교사들은 아직 성취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가르쳐도 경쟁사회에서 돋보일 수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기 전에는 어려움이 클 것으로 생각하고 늘 각오를 다진다고 했다. 임성무(월곡초 교사)씨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틈바구니에서 힘들어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가까운 곳에서 대안교육의 기회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 해도 의미가 크다"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을 해보고 전문가들을 접하고 기초적이나마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고 구체화하는 데 노력을 많이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는 대안교육 이론가와 활동가를 전국적으로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하지만 정작 대안교육의 현장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대안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는 '앞산마을학교'가 더 관심이 가는 이유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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