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도쿄에서 혼마(일본의 유명 골프채 업체)의 사장을 만났더니 '한국의 명사가 혼마를 써줘 고맙다'고 인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골프채도 옛 명검과 마찬가지로 만든 사람의 혼(魂)이 들어가지 않으면 명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돈만을 벌자는 동기만으로는 결코 명품이 나올 수 없다. (골프채) 헤드의 나무를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최고 최선의 것을 추구하여 마지 않는 인간의 창조의욕과 깊은 정신의 결정이 명품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골프채에 그치지 않고 사업도 포함한 모든 인간활동에도 통하는 이아기가 아닌가 한다."(호암의 자서전 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은 항상 최고를 추구했다. 아니, 최고가 될 자신이 없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호암은 직접 기획해 만든 골프장 나무 한 그루, 화초 한 포기의 배치에도 모든 정성을 쏟았다. 작은 것에서부터 최선을 다해야 최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를 향한 노력, 명품을 향한 호암의 끊임없는 열정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작은 것에서도 최고를 추구하라
지난해 말 기자가 찾아간 일본 시즈오카현 스소노시(市) 500컨트리클럽. 딱 500명의 회원만 받아 운영하겠다고 해서 500CC로 이름 지어진 이 골프장은 일본 굴지의 대기업 도큐그룹 계열사였다.
이곳에 호암의 자취가 묻어 있었다. 호암은 도큐그룹이 500컨트리클럽을 만들기 전에 개장한 300컨트리클럽의 회원이었고 도큐그룹의 자문을 받아 안양컨트리클럽을 개장했다.
"호암은 도큐그룹 계열 골프장을 좋아했지요. 일본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300컨트리클럽의 회원이었던 호암은 500컨트리클럽에 대해서도 인상이 깊은 골프장이라고 얘기했지요. 호암은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일본 최고의 골프장을 두루 찾았습니다."(500컨트리클럽 쓰네히로 아오키 사장)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1968년, 호암은 오늘날까지 국내 최고 명문 골프장으로 손꼽히는 안양골프장을 개장했다. 몇십년 후를 내다보고 명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안양골프장 건설에 앞서 일본의 명문 골프장을 다 돌아보고 서구의 유명 골프장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다. 수십년 후에도 국내 최고의 명성을 이어갈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시설만 좋다고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호암은 끊임없이 강조했다. 명품 골프장은 에티켓도 훌륭해야한다는 것이다. 호암은 예고도 없이 안양골프장을 찾아 구석구석을 돌아본 뒤 시설이나 잔디관리가 잘못되어 있으면 직원들을 호되게 야단쳤다.
◆누구도 생각 못했던 것에 대한 노력
호암은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가졌다. 비행기 위에서 헐벗은 우리 국토를 목격한 것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 산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원래 토질이 나빠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것일까? 경기도 광릉 수목원에는 저리도 나무가 잘 자라고 있지 않은가?
그는 국토개발의 시험장을 만들어보겠다며 1968년 용인자연농원(오늘의 에버랜드)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업 역시 최고가 될 수 있도록 꼼꼼한 노력을 기울였다.
'토질, 강우량, 온도, 습도 등이 국내의 평균치여야 하고, 시범사업인 이상 많은 사람이 찾아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지 선정 조건이었다.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일대 1천487만6천m²(450만평)가 입지로 선정됐다.
이 일대 산지 소유자만 2천명이 넘었다. 그 산에는 2천기가 넘는 분묘가 있었다. 땅 소유자와 분묘 연고자들을 찾아 설득하는 작업이 엄청나게 힘든 것이었다. 정부가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민간사업자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재원이 들었다. 하지만 호암은 포기하지 않았다.
호암은 최고의 묘목들을 가져와 시험 재배시키고 장차 미국의 롱우드 식물원 못지않은 명소로 만들 생각이었다. 퇴비를 생산하기 위한 개량종 돼지 종돈까지 600마리나 비행기에 실어 수입했다. 호암은 이 돼지가 농촌으로 많이 보급되면 농촌의 보릿고개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회장님은 용인자연농원 안에 있는 한옥에 기거하며 서울로 출퇴근할 정도로 용인자연농원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용인자연농원에는 돼지 품종 개발을 위한 연구원과 축사가 많았다. 이 때문에 자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돼지새끼를 받아내는 일부터 직접 사람의 손이 가야 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암은 '우리가 정성을 들이는 만큼 우리나라 식량사정이 개선된다'며 사원들을 독려했다."(경주현 당시 자연농원 총괄이사의 회고 중에서)
호암은 용인자연농원에 세계적 테마랜드로 키우겠다는 꿈도 실었다. 미국의 디즈니랜드, 일본의 요미우리랜드처럼 가족들이 찾아와 자연을 배우고 즐기는 놀이터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품 테마파크 에버랜드가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얼굴을 만들자
1970년대 초반, 정부는 삼성에 호텔 사업 진출을 주문했다. 급격한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얼굴이라고 내세울 만한 대표적 호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암은 정부의 방침에 동의했고 호텔 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문세광 사건으로 인해 한일관계까지 급속히 냉각되면서 합작을 했던 일본회사들의 자본금 불입이 중단됐다. 호텔 건립 사업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호암은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79년 신라호텔을 개관, 영업에 들어갔다.
개관 직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2차 오일쇼크가 닥쳤고 10·26사태가 일어나면서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어지다시피했다. 적자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신라호텔은 개업 초부터 팁 안 받기 제도를 비롯해 품질 위주의 영업정책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최고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3년 신라호텔은 흑자로 돌아섰고 1987년엔 미국의 금융전문지가 선정하는 세계 베스트호텔 중 31위에 올랐다. 국내 호텔 중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외관은 물론 내부시설, 실내장치,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일류의 '한국의 얼굴'이 되도록 했다. 정원 조경에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꽂피웠던 우아한 품위와 향기를 재현시켜보자는 의도에서 호텔 이름은 신라로 지었다. 호텔은 일종의 예술작품이며 문화사업이다. 큰 이익이 나는 사업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신라호텔이 한국의 얼굴로서 훌륭히 민간외교의 일익을 맡고 있다. 그러니 즐겁고 용기가 난다."(호암자전 중에서)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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