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기 영화배우인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데자뷰'가 2006년 개봉돼 인기를 끌었었다. 뉴올리언스의 한 부두에서 벌어진 폭파 테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워싱턴)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어디서 본 듯한 여인'에게서 실마리를 찾아 테러를 막는다는 스토리다.
처음 보는 여인을 어디선가 만난 듯한 여인으로 착각하는 것이 프랑스어로 '이미 본'이란 뜻의 '데자뷰'(Deja Vu) 현상이다. 처음 가본 곳인데 이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느끼거나, 처음 하는 일인데 똑같은 일을 이미 한 것처럼 느끼는 현상 등인데 한자로 기시감(旣視感)이 된다. 이런 현상은 누구나 경험한다. 다만 너무 자주 반복되면 의학에서는 정신병으로 다룬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꾸 아는 체한다면 문제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뜬금없이 데자뷰 운운하는 것은 세종시 논란 때문이다. 필자는 국회 출입기자로서 2003년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이른바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의 국회 통과 현장에 있었다. 이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훨씬 앞선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지방분권국민운동의 태동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2010년 1월. 다시는 논란의 중심에 서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세종시로 나라가 시끄럽다.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 등 정치 주체들이 다양한 입장을 쏟아내고 있다. 이를 국민에게 알리는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 전국지와 한겨레'경향신문 등 진보 전국지가 색깔 분명한 보도 경향을 보이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충청과 비충청의 세종시를 바라보는 시각도 온도차가 확연하다.
정리하면 국무총리실과 국토해양부, 지식경제부, 환경부 등 7부2처2청이 옮기는 방안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반대한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반대한다. 한나라당 주류가 반대한다. 수도권 주민들이 반대한다. 수도권 소재 보수 언론이 반대한다. 뭉뚱그리면 수도는 반드시 서울이어야 한다는 고정 인식을 갖고 있는 보수 세력이 반대한다.
11개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에 대해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이 찬성한다. 진보 언론이 찬성한다. 충청권이 찬성한다. 충청권 이외 비수도권은 찬반이 엇비슷하다.
필자는 기시감에 빠진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에도 반대했다. 정 총리는 갑작스레 반대 대열에 섰다. 그러면서 부처가 옮기면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때 나라 지도자와 국회의원과 국민은 나라가 결딴날 선택을 할 만큼 그렇게 하나같이 어리석었다고 정 총리가 정말 확신하는 것일까?
보수 언론은 정부 부처가 '시골'로 내려가면 안 되는 온갖 논리를 그때도 펼쳤고 지금도 펼치고 있다. 전국지 한 여기자는 '부처와 공공기관을 시골로 옮기면 가족이 없어 외로워진 공직자들이 꽃뱀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반대 논리를 펴기도 했다.
달라진 것은 박근혜 전 대표와 혁신도시가 들어설 지역 정도다. 두 번에 걸쳐 부처 이전법이 만들어질 때 박 전 대표는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의 뜻에 따라 '권고적 당론'으로 법이 통과되도록 그냥 놔뒀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과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세종시에 무덤덤했던 지역지들이 기업과 대학, 연구소 유치에 빨간불이 켜질 것을 우려하며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지난 6년여를 이렇게 샅샅이 기억하는 필자는 세종시 데자뷰에 자주 빠진다. 이미 끝난 합의를 놓고 벌이는 찬반 주장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다. 병(病)일까?
설령 병일지라도 2003년과 2005년처럼 지금의 논란이 법과 제도를 통한 국민적 합의로 종지부를 찍고, 모두가 이 합의에 승복하는 기시감에 다시 한번 빠져보고 싶다.
최재왕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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