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國恥百年] ⑦빼앗기고 빼앗기는 땅

권총·망원경 찬 일본인들, 전국 곳곳 유망토지 탐색

일제는 토지조사를 하면서 반발을 우려해 무장 경관을 대동했다. 무력을 앞세운 토지 침탈 앞에 한국의 땅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일제는 토지조사를 하면서 반발을 우려해 무장 경관을 대동했다. 무력을 앞세운 토지 침탈 앞에 한국의 땅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 목차. 1910~1918년 대규모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뒤 발간한 보고서이다.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 목차. 1910~1918년 대규모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뒤 발간한 보고서이다.
191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광덕면 대안동에 사는 이종석이 이기덕으로부터 2백원을 빌리면서 밭 31두락, 논 4두락 등 658원 상당의 토지를 담보로 한 토지전당계약서이다. 이자는 월 4할이었고 기한이 지나 변상치 못하면 담보 토지를 넘기기로 한 것이다.
191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광덕면 대안동에 사는 이종석이 이기덕으로부터 2백원을 빌리면서 밭 31두락, 논 4두락 등 658원 상당의 토지를 담보로 한 토지전당계약서이다. 이자는 월 4할이었고 기한이 지나 변상치 못하면 담보 토지를 넘기기로 한 것이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15분. 의열단원인 35세의 나석주는 중국인 차림새로 서울 을지로에 있던 동양척식회사(동척)에 들어섰다. 금방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나온 길이었지만 의외로 침착했다. 이어 잇따라 급박한 총성이 들렸다. 하지만 식산은행에서와 마찬가지로 투척된 폭탄은 끝까지 터지지 않았다. 나석주는 아수라장이 된 동척을 빠져나왔지만 얼마 가지 못해 출동한 수사대와 총격전을 벌여야 했다. 결국 나석주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결을 택했다.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출신인 나석주는 동척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작료가 올라 생계를 잇기가 힘들었다. 이를 항의하다 소작까지 해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했고,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광복의 길은 보이지 않고,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동척의 만행으로 온 가족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그의 동척 폭탄투척 사건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동척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은 폭탄 투척 정도로는 모자랄 정도로 극악했다.

개항 이후 조선의 땅은 이미 조선의 것이 아니었다. 땅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불가능했지만 1883년 한영수호통상조약 때부터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가능해졌다. 특히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크게 늘어났다. 당시 조선의 땅은 일본에 비해 10~30% 정도의 싼값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싸고 간척이 쉬운 낙동강, 영산강, 금강 유역의 땅을 집중 매입했다. 이어 농산물 유출이 쉬운 철도주변과 개항장이 대상이 됐고, 지역도 경기도와 황해도로 확산됐다.

하지만 이러한 토지침탈에 대해 백성들이 그저 손을 놓고 당한 것만은 아니다. 동학농민전쟁 때 황해도 지방에서는 수천명의 농민군이 일본인 미곡상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농민조직인 활빈당은 1900년 발표한 대한사민논설에서 균전제와 농지를 파손하는 금광 채굴을 엄금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일본인들의 대규모 토지 매입은 1904년 러일전쟁 뒤부터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군산과 목포항에서 일본인들이 사들인 농토가 임피·만경·부안 등 열댓 군에서 모두 790여 섬지기라고 했다. 1909년 당시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대지주 135명 중 109명이 1904~1907년에 땅을 샀다. 그들은 허리에 권총과 망원경을 차고 200~300리까지 나가 유망한 토지를 탐색했다. 그들의 토지 침탈방법은 돈을 주고 사거나 이른바 저당유질(抵當流質)이 있었다. 저당유질은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담보로 잡은 토지를 빼앗는 방법이다. 이 경우 저당잡힌 토지 가운데 십중팔구는 반환받지 못하고 빼앗겼다. 1906년 11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이 온 지 불과 몇 년인데 토지를 잃은 자는 어찌살까?'라며 토지를 잃은 농민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1908년 그들은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었다. 일본 국내의 식량문제와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의 농업이민을 적극 장려했고, 이는 동척에 의해 주도됐다. 동척의 성공은 이미 1903년 일본군 주둔에 따른 군용지 강제 수용에서 충분히 확인됐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 11월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한국주차대 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했다. 또 흩어져 있는 수비대를 모은다며 남별영 자리에 병영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 군사시설이 준공되자마자 한 달 만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수만명의 일본군은 일시에 서울에 들어와 성안팎 주요 건물을 불법 점령해 주둔했다. 그 뒤 국경지역인 함북 나남과 평북 의주를 비롯한 회령·함흥·원산·강계·평양·춘천·대전·대구·마산 등에 대규모 군사시설이 만들어졌다. 남해안의 진해는 일본해군의 군항으로 개발되었다. 서울 용산에는 병참사령부가 만들어지고 군용철도 역도 생겼다. 그 결과 많은 토지가 군용지로 강제 수용당했다. 서울에는 남대문·한강 유역 300만평, 평양에는 평양성 서문·대동강 유역 393만평, 의주 백마산 부근 282만평 등 1천만평이 넘었다.

이에 대해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맥켄지는 이렇게 썼다. '일본군 당국은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의 대부분을 자기네가 쓰는 것으로 말뚝을 쳐놓았는데 여기엔 서울 근방의 강변 토지, 평양 주변의 땅, 한국 북부의 많은 지역, 그리고 철도변의 땅들이 다 들어가 있다. 수만 에이커의 땅은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 내쫓긴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한푼도 받지 못한 채 물러났거나 혹은 공정가격의 10분의 1 혹은 20분의 1 정도의 금액을 받았을 뿐이다. 군대가 점령한 땅은 명목상 전쟁 목적을 위해서라는 것이다'(맥켄지 지음·이광린 역, 한국의 독립운동, 일조각, 1987).

일제는 한국에서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성립시킨다는 구실로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내에 설치된 임시토지조사국에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했다. 농민의 경작지를 국유지로 편입하면서 조선총독부는 130여만 정보의 국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이 땅은 동척 및 일본인들에게 헐값이나 무상으로 넘겨졌다. 반면 땅 없는 농민이 급속도로 늘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봉건적 수취관계를 유지한 채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만들고, 봉건지주를 식민지 지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토지조사에서 분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가 명목상 역토·둔토·궁장토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어 있으면 일단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토지조사 분쟁의 99.7%가 소유권 분쟁이었고, 소유권 분쟁의 65%가 국유지에서 일어났다. 국유지 분쟁은 토지 소유권을 놓고 한국 농민과 일제의 총독부가 대항하는 것으로, 민유지를 강제로 국유지로 편입함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일제는 토지조사 분쟁에 대해 압력을 넣어 강제 화해시키거나 경찰력을 동원하는 탄압에 의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임시토지조사국의 분쟁지심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한국농민의 주장이 부당한 것으로 결정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일제는 식민지배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반발을 일으키게 한 주요인이 됐다.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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