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다고 여겼던 칠곡군 왜관읍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출발 전부터 구름이 잔뜩 끼더니 급기야 차를 타고 나섰을 때엔 쏟아지는 눈이 길을 막아서는 지경이 됐다. 4번 국도를 타고 가면 30분도 채 안걸릴 곳. 하지만 갑작스런 폭설에다 시야까지 막혀 엉금엉금 기다시피했다. 거의 두 시간이 걸려서야 왜관에 간신히 안착했다. 답사 출발지로 가려면 다시 국도를 타고 대구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내민 한 낮 햇살로 눈이 조금이나마 녹기를 기다려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시 엉금엉금 기어서. 열흘 남짓 기다린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길 안내를 맡은 왜관농협 이수헌 조합장과 신호가 맞지 않았다. 답사 코스도 길고 가 볼 곳이 많다며 자동차로 다녀보자고 했다. 두번째 방문은 결국 사전답사가 되고 말았다.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세번째 길을 내디뎠다. 바람은 차갑지만 겨울 햇살이 따사로운 그 곳을 혼자 거닐며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그 옛날 사람들의 발자국을 되짚었다.
길은 신나무골 성지에서 출발한다. 칠곡은 가톨릭 성지가 유난히 많은 곳이다. 예로부터 낙동강 물길을 따라 교역이 활발했고, 그로 인해 왜관(倭官)이라는 이름도 생겨났다. 물이 말라 배가 드나들기 힘들 때엔 강변 양쪽에서 밧줄로 배를 끌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가톨릭이 전파되고 그 많은 성지와 성당,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까지 생겨난 이유를 짐작케 한다. 국도를 따라 왜관으로 가다가 '대구영어마을' 표지판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에 '신나무골 성지'를 알리는 팻말이 나온다. 국도에서 내려서면 바로 보인다. 지천면 연화2리에 있는 가톨릭 성지. 짧게나마 이 곳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처이기도 했던 이 곳은 대구에서 하룻길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에 경상감영에 붙잡혀 온 신자들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와 살며 신자촌을 형성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샤스땅 신부가 이 곳 나무 밑에 움막을 짓고 전교활동을 했는데, '신부가 나무 밑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해서 '신나무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나무골 성지를 왼편에 두고 산을 따라 포장도로를 300여m 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오늘 걷게 되는 임도를 만난다. 길은 제법 널찍하다. 아직 눈이 녹지않은 북쪽 길에는 차가 다닌 흔적도 남아있다. 오늘 길의 반환점이자 목적지인 조양공원 묘지까지 9㎞. 2시간 거리다. 크게 도는 굽이만 예닐곱 차례, 작은 오솔길 굽이를 다 헤아리면 50차례가 넘는 꼬불꼬불한 길이다. 하지만 경사도 심하지 않고 평탄한 편이어서 걷기에는 안성맞춤.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길이다.
이름난 관광지도 아니고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도 아니다. 계절 때문인지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 4시간 가량 걷는 내내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마주 오던 산불감시원 한 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겨우내 눈이 녹지 않을 것 같은 북쪽 그늘진 곳을 걸을 때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참 뜬금없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데. 울창한 소나무 군락이 있는 것도 아니요, 시원한 계곡물이 옆을 따라 흐르는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참 따분할 수 있는 산길이다. 그런데 허위허위 걸음을 내디딜수록 묘한 재미를 느끼게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힘들지도 않고, 어슬렁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다보면 마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작은 굽이와 큰 굽이가 낯선 이를 기대감에 설레게 한다. 지금 걷는 곳은 자봉산 자락길이다. 길 왼쪽 정상부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정상은 장원봉. 그 아래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매원마을이다. 예로부터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3촌이라 불리던 곳. 매원마을 일대에서 장원급제한 사람이 10명이나 배출됐다고 한다. 야트막한 산봉우리 이름이 장원봉인 까닭이 짐작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일부러 만들어놓기라도 하듯 탁 트인 전망대가 눈 앞에 불쑥 다가선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펼쳐진 칠곡 땅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북쪽을 바라보면 유학산, 소학산, 황학산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산줄기를 뻗고 있다. 십장생 중 하나인 학(鶴)의 이름을 딴 산이 지름 1㎞ 안에 세 곳이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산자락 아래에 황학리, 학산리, 학명리, 학상리, 학하리가 있다. 학이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유학산 자락 남쪽에 6·25 격전지였던 다부동이 있다. 유학·소학·황학의 3학산에 얽힌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 어느 문중에서 유학산에 있던 묘를 옮길 일이 생겼는데, 어느 날 밤 묘 주인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묘를 옮기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이튿날 묘를 파자 그 곳에서 학 세 마리가 날아올라 맞은 편 황학산과 마을 서쪽 소학산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칠곡군지'에는 '유학산 빈대 절터' 이야기도 나온다. 유학산 중턱에는 '쉰질바위'라 불리는 5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다. 그 아래 절이 하나 있었는데, 한 때 번창했지만 차츰 스님들이 떠나버리고 노스님 혼자 남게 됐다고 한다.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절 뒤편에 바위에 구멍이 난 곳을 살피면 쌀이 나올 것이니 한 사람의 연명에는 족할 것이다. 그 쌀로 너는 절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튿날 절벽에 가보니 과연 한 사람 먹을 만한 쌀이 작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왔다. 끼니를 해결한 스님은 수행 정진을 계속했는데, 어느 날 신자 세 명이 절에 찾아왔다. 한 사람분 쌀밖에 없던 스님은 저녁 지을 쌀을 구하기 위해 지팡이로 구멍을 후벼팠다. 그러자 쌀은 나오지 않고 흰 빈대가 끊임없이 기어나왔다. 결국 온 절을 뒤덮은 빈대 때문에 노스님은 절을 불 태운 뒤 떠나버렸다고 한다. 잡초만 남은 절터에 지금도 깨진 기왓장이 나온다고 '칠곡향토문화백과'는 전하고 있다.
이야기를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한다. 아기자기하게 쌓아놓은 작은 돌탑이 눈에 든다. 시야가 탁 트인 길가에 마치 산 아래를 굽어보듯이 서 있는 돌탑은 누군가 간절한 바람으로 쌓았을 터. 햇살 머금은 자작나무 군락을 옆에 끼고 길은 계속된다. 저 멀리 조양공원으로 향하는 굽이 길이 보인다. 마지막 큰 굽이다. 남쪽 산사면을 끼고 돌자 조양공원이 나타났다. 며칠 전 함께 동행했던 작가 강주영씨는 "마치 고대 유적지를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정상부에서 산허리를 따라 수십 계단의 석축이 쌓여있고, 그 계단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봉분이 솟아있다. 조양공원 관계자는 "봉분만 8천여기가 있다"고 했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은 이 때 쓰면 딱 적합하리라.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그 속내를 들어보면 대하소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사연을 가슴에 담고 이 곳에 묻힌 이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 없이 따사로운 겨울 햇살 속에 잠들어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기도 했거니와 그로 인해 생채기를 입은 산줄기 때문에 안타깝기도 했다. 부족한 글로 그 느낌을 어떻게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길을 따라 조양공원 맨 꼭대기로 올라서면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공원묘지 반대편을 내려다보면 새로 조성한 골프장들이 마치 거대한 발톱으로 산줄기를 수십 갈래 긁어낸 듯 모습을 드러낸다. 한쪽엔 거대한 공원묘지, 반대쪽 골짜기에는 끝 간데 없이 펼쳐진 골프장이라. 굳이 몇 글자 더 보태 그 느낌을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이 꼭대기까지 오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장자골을 보기 위해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선친인 김영석 요셉이 충청도에서 이 곳에 이사 와 살았다고 한다. 김 추기경의 누나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오래 전 김 추기경이 기억을 되짚어 이 곳을 찾아보려 했으나 길이 바뀌어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장자골은 지금 골프장으로 바뀌어 흔적조차 없어졌다. 골프장 안쪽에 옹기마을이 있었다는 초라한 표지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옹기마을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옹기를 굽던데서 유래했다. 장자터 옹기마을에서 시작해 길이 있던 흔적조차 없는 가파른 골짜기 길(참샘골 또는 아홉살이 고개라 불렀다)을 오르면 지금 서 있는 조양공원 꼭대기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내려가면 또다른 박해 흔적지인 백운리 길붓 마을에 이른다. 다시 동명면을 가로질러 팔공산 자락으로 가면 한티성지까지 이르게 된다. 길 안내를 맡은 왜관농협 이수헌 조합장은 "천주교 대박해 무렵인 1860년대부터 장자골에는 공소(본당보다 작은 성당)가 있었고 29가구 109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신자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아홉사리 고개 중턱에는 옛날 주막 겸 산막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담벼락 돌무더기뿐이라고 했지만 한번 보고 싶었다. 나무가 우거져 길도 없는 가파른 골짜기를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갔지만 결국 바위 절벽을 만나 포기해야 했다. 그 옛날 박해를 피해 삶과 죽음의 고개를 넘나들던 곳은 흔적을 잃었고, 그 아래 골짜기에는 옛 이야기를 알 리 없는 잔디밭이 가득하다. 조양공원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그 곳은 그저 한적한 숲길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이야기 길이 됐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 없이 보여주는, 화석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은 잊혀진 길로 변해 있었다.
글·사진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왜관농협 조합장 이수헌 054)974-2901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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