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파 이정환(57)은 문경새재 아래에 가마터를 잡고 이라보(伊羅保) 다완을 굽는다. 기자와 마주 앉은 그는 동행한 사람의 얼굴에 대해 촌평했다. 관상도 보느냐는 물음에, 오래 형상을 연구하다보니 사람 얼굴도 보게 되더라고 했다.
문경새재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자리잡은 그의 '주흘요'는 고즈넉했다. 불 땐지 꽤 됐는지 가마에는 온기의 흔적이 없었다.
"겨울에는 잘 안 때요. 날씨가 차가우니까, 빚은 그릇이 마르지 않고 굳을 위험이 있지요."
이정환은 1970년 도예에 입문, 올해로 4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뒷일, 그러니까 흙반죽, 나무 나르기부터 시작해, 그릇 형상 빚기, 유약 바르기, 불 때기를 차례로 익혔다. 처음 김해에 자신의 가마를 연 뒤로 가마를 4번 옮겼는데 정착하는 곳마다 깨서 버린 도자기가 동산을 이루었다. 오랜 세월, 그만큼 많은 도자기를 구웠고, 이라보의 대가로 이름도 떨쳤지만 세상에 얼굴을 비친 적은 거의 없다.
"1982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처음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일찍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셈인데, 그 뒤로는 두문불출했습니다."
안으로 더 배우고, 더 다져서 사발로 한 세상을 열고 싶었다. 밖으로 얼굴을 자주 내밀었다면 '사회적 인정 혹은 평가'야 드높아졌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안으로 내공을 쌓으면 저절로 터지는 법이라는 말이었다.
"작가들의 솜씨가 늘어나는 것보다 작품을 보는 세상의 안목이 더 빨리 늘어납니다. 그러니 세상이 나를 못 알아줄까 염려할 필요는 없지요."
그는 세상이 나를 몰라줄까 노심초사하지 말고, 내가 어디쯤 걷고 있는지, 얼마나 갈고 닦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중요함을 넘어 그것이 전부라고 했다. 지금껏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는 않았지만 '내공'을 쌓았으니 됐다고 했다.
그는 시시콜콜 캐묻는 기자를 향해 줄곧 '사발이 곧 내 모습이다'고 답했다. 사발 안에 자신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는 말이었다.
이정환은 이라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문경에서 가마를 열고 있는 도예가들도 '이정환 선생이라면….'이라는 말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라보란 사토(모래)가 많이 함유된 흙으로 빚은 사발인데, 물레 위에서 성형한 그릇(器)에 흘러내림 식으로 유약을 처리해 회화적 질감을 더한 것이다. 잎녹차나 말차를 마실 때 쓴다. 어떤 면에서 가장 원초적인 사발이며, 세련미보다는 투박미, 인공미 보다는 자연미를 강조하는 사발이다. 우툴두툴하고 거친 느낌을 주는데,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이라보 다완은 사람이 애쓴다고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사발에 정교한 멋을 내자면 애쓰고 노력할 일이지만, 자연미란 것은 애쓰고 노력한다고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라보 다완을 두고 '대작 아니면 졸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정환씨는 "똑같은 사토와 똑같은 유약에 한 사람이 한 번에 구워내도 작품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발은 쓸모없고, 어떤 사발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100개를 구워 10개를 건지면 운이 좋은 것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건진 10개 중에서도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드물다고 했다.
"이라보 다완은 애면글면 매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손이 가는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사발을 구워 온 손이 자신도 모르게 흙을 주무르고, 거기에 물과 불과 바람이 기운을 더해 탄생하는 것이지요."
이정환씨는 이라보 다완에는 천지자연이 들어 있다고 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의 힘보다는 자연의 기가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데다, 모양과 색깔이 자연의 회화적 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보 다완의 구연(그릇의 가장 윗부분으로 차를 마실 때 입술이 닿는 부분)은 울퉁불퉁해서 마치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는 느낌을 준다. 거기에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무늬와 빛깔, 높낮이가 있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안에서 달이 생기기도 하고, 산이 솟아오르기도 하고, 물이 흐르기도 한다.
월파 이정환의 말투에는 체념 혹은 허무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허무해 보인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비어 있는 상태라고 보면 맞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 비움이란 오랜 세월 도자기를 만들어 오면서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오래 흙을 빚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듯 하다고 했다. 흙의 성질이 그렇기에, 사람도 닮는다는 말이었다.
"이라보 다완은 물레의 흐름에 따라 사발의 입술 부분의 흔들림이 달라집니다. 유약의 흐름에 따라 그려지는 무늬도 다릅니다. 물레가 흔들리니 그릇이 흔들리고, 그릇이 흔들리니 차를 마시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립니다. 자연스러운 흔들림이 곧 안정입니다."
그는 '차려' 자세와 편안한 자세에 이라보 다완을 비유했다. 차려 자세에는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래서 불편하고 딱딱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모습에는 안정감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가 도예에 입문할 당시만해도 가마에는 도공, 흙파는 사람, 유약 바르는 사람, 불 때는 사람, 나무 준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사기촌'으로 이름난 곳은 동네 사람들이 전부 가마에 의지해 살았다. 그러나 요즘은 사기장이 이 모든 일을 다 한다. 이정환씨는 주흘요에서 아들과 조카를 가르치고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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