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瀟湘斑竹(소상반죽) 젓가락

동북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천안함 사태 때문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은 결정적인 볼쏘시개가 됐다.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중 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게 북중 간 '혈맹관계'에 비하면 외교적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것을, 외교 현실은 냉엄하다는 것을.

청와대는 애써 한중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며 항간의 우려를 잠재우기에 바쁘다.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이달 6일 "과거에도 북한의 김정일, 또 김일성 두 분이 중국을 방문한다고 할 때 북중 정상회담 경우에 우리에게 사전 통보를 했다는 경우는 없었다"며 "양국 관계 갈등이나 균열, 그런 문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7일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조찬 간담회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 결과가 나오면 중국 측에 통보하고 협의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할 경우 중국 정부도 납득하고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이날 류우익 주중 대사를 불러 김 국방위원장의 방중 결과를 공식 브리핑한 것도 "한중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 가장 먼저 통보해왔다"(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제스처는 오히려 불신을 키우는 측면도 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동맹이 혈맹에게 깨졌다" "우리가 상대를 몰랐다"는 인식이 많다. "아무리 외교 관례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 김 위원장의 방중 여부를 귀띔받지 못한 것은 문제"라는 비판도 적지않다. 안팎의 따가운 눈총때문인지, 요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은 가장 늦게 불이 꺼지고, 직원들은 저녁식사조차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라고 한다.

사실 이번 사태 이전만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외교력은 높게 평가받았다. 지난해 G20 정상회의 한국 유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수출에 이어 올해 제2차 핵정상회의 서울 유치에도 성공하자 여권 일부에서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지 상상할 수 없다"는 자화자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진정한 외교실력을 보여줄 무대는 이제 열리고 있다. 세간의 추측대로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으로 밝혀지더라도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징계 해법찾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엔 등을 통한 국제 제재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형편이고, 러시아 등 북한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분위기도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우리의 '국운'에 영향을 미친 것은 비단 이번 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야사를 하나 보자.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조선은 급하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참전을 주저하면서 뒷짐만 지고 있었다. 쓸데없이 남의 나라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어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선은 차천로(1556~1615), 한석봉(1543~1605), 이항복(1556~1618), 류성룡(1542~1607)을 외교사절단으로 구성,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만나게 했다. 차천로는 시를 짓는 능력이 당대 최고였고, 한석봉은 알려진대로 조선 최고의 명필이었다. 또 이항복은 외교관의 필독서였던 '좌전'의 대가여서 직접 담판에 나섰다.

류성룡과 이항복이 이여송을 만나 같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이여송이 "소상반죽(瀟湘斑竹) 젓가락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소상반죽이란 중국 소상강 근처에서 자라는, 눈물 자국 모양의 무늬가 박혀 있는 대나무로 구하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류성룡이 예상했다는 듯 품에 지니고 있던 소상반죽을 꺼내놓자 이여송은 '조선에도 인물이 있구나!'하고 참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 정부는 다시 중국 등 국제사회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는 처지가 됐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외교장관들과 만나는데 이어 15일 경주에서 중·일 외교장관과 3국 회의를 갖는다. 또 20일로 예정된 천안함 발표 이후에는 이달 말쯤 제주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우리에게 지금 상대를 되돌려세울 '소상반죽(瀟湘斑竹) 젓가락'이 있는 지 몹시 궁금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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